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이 지난 8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감사원의 감사 재연장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면서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감사원은 직무상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누구의 부당한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다.”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 감사원장이 1993년 2월 취임연설에서 한 선언이다. 그는 단군 이래 최대 전력증강사업인 율곡사업의 비리에 대해 감사를 단행했다.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까지 실시하고, 전직 국방장관 2명과 공군·해군 참모총장 3명,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감방으로 보냈다. ‘성역’으로 불리던 안기부도 평화의 댐 비리와 관련해 감찰을 강행했다. 이를 통해 문민정부 초기 개혁에 큰 몫을 하고, 감사원의 위상을 확립해 많은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권력의 눈치를 보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감사원은 언제부터인가 이런 빛나는 역사를 망각했다. 최재해 감사원장은 최근 국회에서 “감사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전 감사원장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충격적인 말이다. “감사원은 대통령에 소속하되, 직무에 관하여는 독립적 지위를 갖는다”고 명시한 감사원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현직 감사원장이 ‘권력의 하수인’임을 자처한 치욕스런 망언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같다.
감사원은 국민권익위원회에 대한 감사 기간을 이례적으로 두 차례나 연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현희 위원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며 공개적으로 사퇴 압력을 가했으니, 표적감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문재인 정부 때 환경부 장관은 산하기관장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하다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로 실형이 선고됐다. 윤석열 정부는 이를 회피하기 위해 감사원을 ‘찍어내기 해결사’로 고용한 듯 싶다.
감사원도 잘못이지만 ,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기관장들이 정권이 바뀐 뒤에도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국민도 있다 . 새 대통령과 호흡이 중요한 정무직의 경우 비록 임기가 남아 있어도 스스로 물러나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나름 일리가 있다. 특히 전 정부에서 큰 책임을 지던 인사가 자리에 연연하는 것은 보기에 민망하다.
하지만 법으로 독립성과 중립성을 규정한 정부기관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권익위의 근거법인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법’은 “권익위는 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한다”(제16조1항)고 명시하고 있다. 또 “(위원장은) 금고 이상의 형, 심신장애, 정당의 당원 등의 사유가 아닌 한 본인 의사에 반하여 면직·해촉되지 않는다”(제16조3항)고 엄격한 신분보장까지 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권익위의 기능인 공직사회의 부정부패 방지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독립성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권익위원장이 대통령의 눈치만 본다면 부정부패를 근절할 수 있겠는가?
감사원은 권익위의 청탁금지법 위반에 대한 제보 등을 감사 연장 사유로 제시한다. 전 위원장이 언론인들에게 3만원 이상의 식사를 제공한 게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감사를 두 번이나 연장할 정도로 감사 역량을 쏟을 일인지는 의문이다.
감사원은 탈원전, 북한 어민 강제북송 사건 등 문재인 정부의 대표 정책이나 정치 쟁점이었던 이슈에 대한 감사도 하고 있다. 감사는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 국민적 관심도 등 사안의 중요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한다. 이들 사안이 그 기준을 충족한다면 감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는 뭐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나서는지 먼저 답해야 한다.
감사원의 부적절한 감사 중에서 국민이 알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적지 않은 기관들이 감사원이 두려워 제대로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사모펀드인 디스커버리펀드 검사와 관련한 금감원 감사는 일례다.
검찰은 사모펀드인 디스커버리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금융위가 지난 2월 금감원의 검사 결과를 토대로 펀드를 제재할 때는 없던 내용이다. 펀드의 변호인이 재판에서 검찰의 무리한 기소라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원이 갑자기 금감원 감사에 나서서 “펀드 검사 때 봐주라고 지시한 윗선을 불라”고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다. 전현희 권익위원장이 폭로한 내용과 판박이다.
감사원은 민간인인 펀드 직원까지 조사하면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실상 차단했다. 지난해 7월부터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변호인 입회를 허용한 내부 규정을 어긴 것이다. 펀드 직원에게 재판의 핵심 쟁점에 대해 집중 추궁한 것도 재판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심지어 펀드 대표의 형인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개입 가능성도 추궁했다고 한다. 금감원 감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감사원이 언제부터 ‘검찰 도우미’로 전락했는지, 황당하기까지 하다.
감사원은 공무원의 직무 적법성은 물론 적정성까지 감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그만큼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 확보가 생명이다. 감사원이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면 공직자들은 정권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나라나 국민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일부 보수언론까지 감사원의 무리한 감사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겠는가?
민주당은 감사원을 맹비난한다 . 하지만 그에 앞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 최재형 감사원장 시절 월성원전 1 호기 조기 폐쇄의 타당성에 대한 감사를 벌이자 , 당시 여권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감사원장이 어떻게 탈원전 정책을 뒤집으려 하느냐며 공격했다 . 청와대가 임명 당시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할 (중략) 적임자 ” 라고 치켜세운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
문재인 정부는 감사원이 자기 뜻과 다르다며 감사를 막았다. 윤석열 정부는 감사원이 자기 뜻에 따라 무리한 감사를 하도록 했다. 두 정권이 방향은 서로 정반대지만, 감사원이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하고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를 바라는 욕구는 똑같다. 그런데도 상대방의 허물만 비난한다.
이제는 이런 끝없는 내로남불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전현희 위원장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이겨내며 임기를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그만두는 게 가장 쉬운 길이다. 정권의 파상공세에 맞서 자리는 지키는 게 진정한 용기이고, 감사원의 정상화를 위한 출발점이다. 전 위원장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감사원 감사의 적절성을 따져서 잘못이 있다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감사원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정연주 당시 한국방송(KBS) 사장에 대한 감사를 통해 해임요구안을 제출해, 대통령이 해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감사원의 해임요구 자체가 부당하다면서 정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감사원은 지금까지 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나 반성을 한 적이 없다. 감사원은 최근 한국방송 경영진에 대한 감사를 다시 시작했다. 전 위원장은 “불법감사에 대해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아야 한다.
정치권 스스로 감사원을 악용하려는 유혹을 떨치기는 쉽지 않다. 감사원이 권력에 맞서 자신의 위상과 권위를 확립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제도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민주당의 신정훈 의원 등은 감사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하면 형사처벌을 받도록 하고, 특별감사는 국회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의 감사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일부 보수언론은 감사원이 ‘국회 하위기관’이냐고 비난하는데, 그럼 감사원이 ‘권력의 하수인’이냐고 묻고 싶다. 이참에 미국과 영국처럼 감사원을 행정부가 아닌 국회 산하로 옮기거나, 아예 독일과 일본처럼 행정부와 국회에 모두 속하지 않는 독립기관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더는 “대통령 집권 전반기 2년은 전 정권 관련 이슈로 정신없이 바쁘다가, 후반기 3년은 쉬고, 대통령이 바뀌면 다시 바빠진다”는 슬픈 코미디 같은 말이 사라져야 한다.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