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요정설이 반복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징후다. 6공화국 헌법은 이미 시효를 다하고 온갖 문제를 양산한 지 오래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이라며 대통령의 비대한 권력을 비판하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헌법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다. 사면권 같은 기이한 법률 등을 제하면 실무 권한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 술자리 사진에 말풍선 바꿔 붙이는 놀이가 온라인에 유행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 “각하, (수도권에 비가) 300㎜ 왔다고 합니다.” “난 500 시켰는데?”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윤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고 난 다음엔 이랬다. “각하, 이코노미스트 압수수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코노미야키 먹고 싶다고? 어 시켜 시켜.” 윤 대통령 지지자들과 몇몇 신문은 정색하며 “가짜 뉴스”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저런 건 가짜 뉴스가 아니라 풍자의 영역이다. 게다가 가짜 뉴스 운운하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몰랐던 사람들까지 ‘윤석열 밈’을 전부 찾아보게 됐다.
모든 정치인은 조리돌려질 운명에 처한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앙겔라 메르켈도 피할 수 없다. 다만 ‘윤석열 밈’에는 조금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데, 윤석열의 ‘정치’에 대한 풍자가 아니라 ‘탈정치’ ‘비정치’ ‘무정치’에 대한 조롱이라는 점이다. 특히 술과 관련한 조롱이 많다. 물론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면 술 좋아하는 건 사생활에 속한다. 문제는 대통령에게서 정치의 의지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대한 비전은커녕 하고 싶은 일조차 없어 보인다. 시민들은 이런 대통령을 뉴스로 접하며 당혹감과 자괴감이 든다. 저 사나이는 대체 왜 대통령이 되려 한 걸까.
역사적으로 자기 의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 존재는 크게 두가지로 분류돼왔다. 꼭두각시이거나, 요정(천사)이거나. 꼭두각시는 다른 인간의 조종을 받지만 요정은 초월자의 신성한 목적을 따른다. 감히 1630만명 넘는 시민의 지지를 받은 사람을 꼭두각시라고 생각하긴 어려우므로 자연스럽게(?) 요정설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대통령 윤석열은 한국 사회를 각성시키기 위해 나타난 요정인 것이다. 지금 상황은 마치 “이래도 제왕적 대통령제 계속할 거야? 낡은 헌법 안 바꿀 거야? 이래도?”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집권 초 지지율이 이렇게 낮은 경우도 이명박 정부 이후 처음이다.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명박, 그는 ‘최초의 요정 대통령’이었다. 당선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했고 광우병 논란이 일어나며 시민들이 광장에 쏟아져 나와 촛불시위를 벌였다. 그때 나온 농담이 ‘이명박 요정설’이다. 그는 사실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들을 흔들어 깨울 민주주의 요정이라는 것이다. 요정설은 이후로도 이어져서 박근혜 탄핵 당시에도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 요정이란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도 저 둘은 윤 대통령에 비하면 자기 주관이 있긴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요정설이 나오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윤석열이라는 요정을 불러내는 ‘요술램프’가 됐다.
대통령 요정설이 반복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징후다. 6공화국 헌법은 이미 시효를 다하고 온갖 문제를 양산한 지 오래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이라며 대통령의 비대한 권력을 비판하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헌법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다. 초헌법적 사면권 같은 기이한 법률 등을 제하면 실무 권한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엄청난 일 중독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되고 나니 밖에서 볼 때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대통령에게 과도한 열망을 투사한다. 공화정의 대통령을 세종, 정조 같은 봉건시대 왕에 비유하거나 동일시하는 시민들도 많다. 심지어 전문가, 지식인이라는 자들도 그런 글을 쓴다.
높은 기대에 맞게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권한을 줄이고 그에 맞춰 기대도 줄이자는 거다. 특히 사면권은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면 사실 대통령제를 유지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럼 내각제로 가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럴 리가.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같은 질문은 전형적인 가짜 질문이다. 흔히 개헌을 내각제와 같이 묶곤 하지만, 내각제도 단점이 없지 않다. 현 상태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제로 가면 혼란이 커질 수도 있다. 개헌의 핵심은 따로 있다. 뿌리 깊은 승자독식형 권력 구조의 해체다. 특히 견제받지 않는 권력들, 예컨대 검찰총장, 경찰청장도 선출직으로 바꾸고 선출된 권력에 대한 시민 소환권 및 탄핵권을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나태한 권력, 부패한 권력을 시민이 즉각 끌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 요정설’에 일말의 의미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