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선생님, 그런데요.” 아이의 볼멘소리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나는 어린이도서관의 지역 작가 프로그램으로 초등학생들과 ‘지도탐험왕’ 수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세계지도를 그리는 날. <피터 팬>의 해적들이 살고 있는 바다는 어딜까? <코코>의 해골 축제는 어느 나라에서 열릴까? 하지만 기대만큼 활기가 보이지 않아 내심 걱정하던 차였다.
“그런데?” 내가 되묻자 아이가 말했다. “저번 시간이 훨씬 재미있었어요. 그거 또 하면 안 돼요?” 그거? 아, 우리는 동네지도를 그렸지. 너희들이 너무 떠들어 쫓겨날 걱정을 했고.
나는 로컬푸드 운동의 개척자인 게리 폴 나브한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아이들과 그랜드캐니언에 갔을 때 뜻밖의 경험을 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당연히 발아래 펼쳐진 장엄한 경치에 넋이 나갔지만, 아이들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바닷가 곶에 갔을 때도 비슷했다. “내게 잡힌 손을 뿌리치고 땅바닥에서 뼈, 솔방울, 반짝이는 사암, 깃털, 야생화를 찾기 시작했다.” 어른과 아이는, 망원경과 돋보기, 서로 다른 호기심의 렌즈를 가지고 있다.
돌아보니 첫 만남부터 예상은 어긋났다. 나는 부모가 신청한 수업에 부모의 차를 타고 온 아이들이 많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대부분 직접 신청했고 혼자 버스를 타고 왔다. “용감하네.” 나는 그림지도에 암호로 표시해둔 각자의 학교를 찾아보라고 했다. 모두 척척 찾아냈고 다른 학교도 앞다퉈 맞혔다. “제가 이 동네 있다 이사 왔거든요. 제 친구는 저리로 전학 갔어요.” 아이들의 사교지도는 제법 넓었다.
그런데 다음엔 반대의 의미로 놀랐다. “서울 아닌 데서 태어난 사람?” 이상하게 주저했다. 학교 이름을 제일 잘 맞힌 아이가 물었다. “저기요, 공덕도 서울이에요?” “야! 여기서 걸어서 10분이야.” 나는 지도 위에 태엽 기차를 굴린 다음 물었다. “서울역과 용산역의 차이를 아는 사람?” 경부선과 호남선의 차이를 알고 있을까? 모두 눈알만 굴렸다. 마지못해 한 아이. “서울역에선 기차를 타고요. 용산역에선 영화를 봐요.” “너 방학 때 김제 갔다며. 기차 어디서 탔어?” “몰라요.” 그러면서 기차를 비행기처럼 피웅 날렸다.
그럼 망원경을 버리고 돋보기를 들까? ‘동네 그림 빙고’를 나눠주자 아이들은 당황해했다. 삼각형 집, 막다른 길, 한아름보다 큰 나무…. 도대체 이걸 왜 찾아야 하지? 하지만 너희들은 하게 될 거야. 한국 학생들은 문제가 나오면 본능적으로 맞히려 들거든. “아, 여덟칸 이상 야외계단요. 우리 학교가 언덕에….” 말이 끝나기 전에 모두 저요 저요 손을 들었다. 답만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 거기에 얽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더했고, 꼬리에 꼬리가 이어졌다.
“이제 너희들이 지도를 채워봐. 공원에는 뭐가 있지?” 무궁화, 다람쥐, 바둑 두는 할아버지, 그리고 파란 네모가 나타났다. “수영장이 있었는데요.” 나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름날 공원 입구에 커다란 튜브 수영장이 놓였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장구를 쳤고 엄마들은 시름을 잊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지켜본 내가 기억하는데 놀아본 아이가 어떻게 잊겠나? 다른 아이가 말을 더했다. “코로나 때문에 없어졌어요.” 다음엔 우리 동네에 생겼으면 하는 걸 그리게 했다. 아이들은 지도 가운데 용산공원을 푸른 물감으로 채우고 공룡을 풀어놓았다.
작은 감탄, 사랑, 상실이 세상을 또렷이 보게 한다. 아빠에게 혼난 뒤 억울한 마음에 숨어 있던 놀이터, 태풍이 오기 전 무시무시하게 붉은 석양을 만난 계단, 지도 교실에서 미친 듯 놀다 친해진 아이와 떡볶이를 먹은 분식집…. 그 조각들이 모여 각자의 동네지도가 된다. 막연한 세계는 그걸 이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