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이 아니었던 막스 베버는 고등학교 때 주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교사의 눈을 피해’ 괴테 전집 40권을 뗐다고 한다. 대략 150년 전 일이다. 지난 8월 독일 바이에른주 정부는 고등학교 의무 독서 목록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이 뉴스는 각계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해명에 나선 주정부는 <파우스트>가 단지 의무 독서 목록(이것은 허울 좋은 ‘권장’ 목록이 아니라 반드시 읽게 돼 있다)에서 빠지는 것뿐이며 “금지됐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금지’일지도 모른다. 2019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가 <파우스트>를 대입자격시험 범위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을 때, 이 조치의 비판자들은 이를 사실상의 금지, 사형선고로 받아들였다. 왜일까. 효과가 같기 때문이다.
이제 고전과 관련한 소식은 이런 퇴출 뉴스뿐이다. 고전 출판에 경력을 소비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그냥 지나치기 힘든 문제도 보인다. 독일에서도 고전의 생사는 교육과정에 밀어넣는 데 달렸다고 전제되는 것이다. 즉 고전의 목숨을 유지하는 부담이 고스란히 어린 세대의 몫이 되고 있다. 사람들 생각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직업비평가의 시조 격인 생트뵈브의 <고전이란 무엇인가>(1850)가 여기서 참고가 될지 모른다. 거의 정반대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트뵈브는 독서의 멸망이나 고전의 퇴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고전 목록을 영원히 대접받는 자리로 보지도 않았다.
고전이란 무슨 뜻인가? 그는 먼저 라틴어 ‘클라시쿠스’(고전)의 뜻을 검토한다. 이는 원래 일정 수준 이상 수입을 가진 시민 계층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타 평범한 작품들과는 다른 급으로 생각해야 할 특별한 작품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보다시피 여기에는 오래됐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점에서 고전(古典)이라는 한자어는 딱히 좋은 번역어는 아니다.
고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런 건 없다. 정확하게는, 고전을 써내는 공식 같은 건 없다. 당시 ‘중용, 우아, 합리성’이 고전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트뵈브가 보기에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조차 이런 기준에 별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이 고전이 되는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될 뿐이다. 생트뵈브는 발표 당시 ‘현대의 고전’ 같은 간지러운 소리를 들을수록 25년 뒤에 초라해질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한다. 고전의 순위는 유동적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흥행 작가였던 몰리에르는 원래 라신이나 코르네유와 동급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몰리에르는 그들을 넘어서는 천재로 떠올랐다.
여기서 생트뵈브의 모든 논의를 요약할 수는 없다. 아마 그의 현안은 고전이란 무엇인지 답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고전을 사유화하려는 사람들에게 제동을 거는 것이었던 듯하다. 도대체 고전의 쓸모는 뭘까? 그의 답은 “모든 여행과 경험을 마친 이에게 찾아온 기쁨”이었다. 이 묘하게 실망스러운 구절을 썼을 때 그는 40대에 불과했다. 그러니 조금 해석을 가미해도 될 것이다. 이게 정말 노년이라는 뜻일까? 실은 어떤 조건의 비유가 아닐까? 입학시험이나 지적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벗어나, 고전을 수단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된 상태의 인간 말이다.
아마 우리에게 필요한 고전 목록은 어린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 ‘늘그막의 인간’을 위한 길잡이여야 할지 모르겠다. 권위로 지정한 텍스트들이 아닌, 지금이라도 읽지 않으면 후회할 작품들로 채워진 목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