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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력중독자의 오만을 제어하려면

등록 2022-09-06 18:24수정 2022-09-07 02:05

[고명섭의 카이로스]
권력은 오만을 생리로 하는 것이어서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언제든 자기동일성의 강화로 이어진다. 권력이라는 독이 주입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권력자의 자아는 팽창하고 한번 팽창한 자아는 제약 없이 더 커지려고 한다.

카노사성 앞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알현을 요청하는 하인리히 4세. 위키미디어 코먼스
카노사성 앞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알현을 요청하는 하인리히 4세. 위키미디어 코먼스

서양 근대사상의 문을 연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분리, 곧 심신이원론을 처음 주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형이상학적 원리이지만, 생각을 조금 밀고 가면 정치적 원리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분리는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분리를 내장한다. 데카르트의 원리는 데카르트 당대에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다. 서양 역사의 오크통 속에서 긴 세월 동안 발효된 것이 데카르트 원리, 특히 이 원리의 정치적 성격이다.

데카르트 원리의 정치적 기원을 찾으려면 5세기 말 교황 겔라시우스 1세가 동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아야 한다. 그 편지에서 겔라시우스 1세는 이 세상이 교황의 권위와 황제의 권위라는 이중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정신의 칼’로 종교의 영역을 다스리고 황제는 ‘물질의 칼’로 세속의 영역을 다스린다. 두 권위는 각자 영역이 따로 있으므로 서로 섞여서는 안 된다. 이 논리에는 견제심리가 들어 있다. 당시 교황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지지대를 잃은 터였다. 기댈 곳 없는 교황이 동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을 막아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고 ‘두자루 칼’이라는 방어 논리를 세운 것이다. 겔라시우스 1세가 내민 ‘두자루 칼’은 서양 중세 역사를 규정한 정치적 자장의 양극을 이루었다.

이 ‘두자루 칼’이 정면으로 부딪쳐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11세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레고리우스 7세로 등극하기 전 신학자 시절의 힐데브란트는 교회의 정신적 권위가 왕국의 세속적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원리, 곧 ‘힐데브란트 원리’를 제창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 원리에 입각해 그때까지 세속군주가 행사하던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청으로 되돌리는 칙령을 발표했다. 교회를 지배하던 황제의 권력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조처였다. 분노한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성직자 회의를 소집해 그레고리우스 7세를 가짜 성직자로 선언하고 교황 폐위를 결의했다. 교황을 향해 황제의 칼을 들이미는 정면 대결 선언이었다.

황제의 반발에 맞서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는 더 강경한 반격책을 썼다. 황제를 따르면 귀족이든 사제든 모두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했다. “나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이 된 자다. 나는 성스러운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신에게만 심판받는다.” 하지만 독일 주교와 귀족이 교황의 위세에 눌려 황제에게 등을 돌리고 반란 조짐까지 일자,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에 머물고 있던 교황을 찾아갔다. 한겨울 찬 바람 속에서 황제는 수도사의 거친 옷을 입고 맨발로 서서 고해자의 모습으로 교황 알현을 요청했다. 교황은 모르는 척하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야 성문을 열어주었다. 황제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고 교황은 파문을 취소했다. ‘카노사의 굴욕’은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의 칼이 황제의 칼을 제압한 사건이다.

황제를 무릎 꿇린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0년 로마 종교회의에 모인 성직자들에게 불같은 연설을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왕과 군주, 이 왜소한 인간들이 교회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라.”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일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를 거부하고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황제로 추대하자 하인리히와 루돌프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교황은 다시 한번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번엔 운명이 황제 쪽으로 돌아섰다. 하인리히는 내전에서 승리해 제후들을 굴복시킨 뒤 1084년 로마를 약탈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했다 복귀해 로마를 되찾았으나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왕권과 교권의 갈등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 종교와 세속을 둘러싼 정치철학적 논쟁도 멈추지 않았다. 교권주의자들은 세속권력이 종교권력 아래 있다고 주장했고, 왕권주의자들은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이 분리돼 있다고 주장했다.

‘두자루 칼’ 또는 ‘세속과 종교의 이중 권력’이 만들어내는 대결과 투쟁의 드라마는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다시 나타난다. 새 드라마의 주인공은 장 칼뱅(1509~1564), 더 정확히 말하면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칼뱅 시대의 드라마는 세속권력의 위세에 맞선 신생 종교권력의 투쟁이 줄거리를 이루었다. 칼뱅의 개혁사상은 엄밀히 말하면, 세속권력에 대한 저항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었다. 칼뱅은 선배 마르틴 루터처럼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민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루터파는 독일 제후들과 연합하고 있었기에 이 원칙이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칼뱅파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칼뱅파가 세력을 구축한 스코틀랜드나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과 결합한 왕권이 신교도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군주에 대한 신민의 복종이라는 원칙을 지켜갈 수 없었다. 군주의 폭압을 견디지 못한 칼뱅파는 칼뱅 사상 안에서 출구를 찾아냈다.

이를테면 스코틀랜드의 개혁파 지도자 존 녹스(1514~1572)가 그런 사람이었다. 녹스는 메리 여왕이 사형 선고를 내리자 칼뱅의 도시 제네바로 도망가 거기서 칼뱅 사상을 공부했다. 칼뱅의 신학이 집약된 <기독교 강요>는 군주에 대한 인민의 복종을 원칙으로 제시하면서도 ‘왕이 극심한 방종으로 인민을 억압할 경우에는 인민의 지도자들이 폭군에게 항거하여 인민을 보호할 수 있다’고 저항의 뒷문을 열어놓았다. 이 구절에서 녹스는 신교도를 짓밟는 군주에게 대항할 권리를 읽어냈다. 녹스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왕이 선하든 악하든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부르는 노래다. 신이 그렇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왕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이 스스로 부정을 창조하고 유지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불경스럽다.” 녹스는 영국으로 돌아가 가톨릭 왕정에 맞서 투쟁한 끝에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다.

저항권이 칼뱅의 신학 안에서 일단 용인되자 이 권리가 인민의 의무가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칼뱅파가 소수자로서 극심한 탄압을 받던 프랑스에서 사상 변화의 불길은 한층 더 맹렬했다. 1572년 프랑스 칼뱅파 위그노 교도 수만명이 성 바르톨로메우 축일에 벌어진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이 유혈의 땅에서 태어난 책이 익명의 칼뱅파 신도가 쓴 <폭군토벌론>이다. 이 책은 인민이 상위에 있고 왕은 인민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왕이 신의 법을 짓밟고 교회를 파괴한다면, 그리하여 인민이 정부로부터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그런 왕에게 저항하는 것은 합법일 뿐만 아니라 의무다.’ 이 책은 신이 인민을 통해서 행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민이 봉기해 왕을 타도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이런 저항의 논리를 무기로 삼아 프랑스 칼뱅파는 왕에게 맞섰고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두자루 칼’ 사상은 칼뱅파 저항의 저류를 이룬다. 지상의 군주는 하늘로부터 세속의 칼을 받았고, 개혁파 종교는 정신의 칼을 받았다. 이 두 칼, 곧 두 권위는 서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5세기 겔라시우스 1세 때 선포된 원리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세속권력에 대한 저항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품은 원칙이 된 것이다. 이 원칙은 ‘인민의 자유를 지키려면 권력이 분립해 서로 견제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근대 정치원리 탄생의 배경이 됐다. 어떤 경우에도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권력이 나뉘어 서로 견제할 때 인민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 이 근대 민주주의 근본원리는 긴 세월 다량의 정치적 유혈 속에서 자라났다.

권력은 오만을 생리로 하는 것이어서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언제든 자기동일성의 강화로 이어진다. 권력이라는 독이 주입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권력자의 자아는 팽창하고 한번 팽창한 자아는 제약 없이 더 커지려고 한다. 오만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권력중독형 인간이 권력을 쥘 경우에 이런 위험은 더 커진다. 이를테면 권력자가 검찰권을 틀어쥐고 모든 저항하는 입에 재갈을 물릴 때 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 원리는 작동을 멈춘다. 여기서 폭정까지는 한걸음밖에 되지 않는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 시기, 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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