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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공이라는 곰

등록 2022-09-01 18:20수정 2022-09-02 02:41

쓰레기 불법투기 발생 우려가 큰 곳에 설치한 ‘양심 거울’. 연합뉴스
쓰레기 불법투기 발생 우려가 큰 곳에 설치한 ‘양심 거울’. 연합뉴스

[크리틱]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보이지 않는 도시> 저자

인생의 반을 서울에서, 나머지 반을 파리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양쪽 모두에서 이방인 느낌을 받는 때가 있다. 대신 양쪽의 장단점을 어느 정도 알게 되니, 한쪽의 장점으로 다른 쪽의 단점을 상대 비판하기에 좋은 처지다. 이럴 때 많은 이가 취하는 손쉬운 방법은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는 곳의 장점을 들어 반대쪽의 문제를 공격하는 것이다. 선진국을 배우고 따라 하자고 하면, 듣는 사람은 반박하기 힘들어진다. 비판하는 자가 예를 들고 있는 한수 위처럼 보이는 사례의 허와 실을, 듣는 이는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정보권력의 불균형’ 사례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전문가나 지식인이라는 이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숱하게 본다. 나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니 파리의 좋은 점을 들어 서울의 문제점을 비판하기에 꽤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가진 지정학적 이점을 포기하고 파리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내가 살아본 24년 동안 파리는 항상 공사 중이었다. 장애인 통행 편의를 위해 보도턱과 경사를 없앤다며 한동안 보도를 뒤집어놓은 건 그렇다 치자. 트램을 설치한다며 몇년 동안 집앞 도로를 다 뜯어놓아 차량정체를 유발하더니, 사거리 추돌사고가 잇달아 발생하자 신호등 사거리를 원형 로터리로 바꾼다며 한동안 교통지옥을 만들기도 했다. 야간에 과속으로 인한 인명사고가 연이어 일어나자 아예 도로를 좁히고 구불구불하게 만드느라 차들은 주변 도로로 우회하느라 몇십분씩 허비해야 했다.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이면도로에 쓰레기를 몰래 갖다 버리고 취객들이 노상 방뇨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보도 포장을 고급 석재로 바꾸고 그곳에 사람 허리춤보다 높은 화단을 설치하느라 또 한동안 도로는 막혀 있었다.

모든 것이 지독히 느린 이곳에서 매년 도로를 파헤치는 파리시 당국의 이해 못 할 부지런함 때문에 3차선 차선 중 1차선 이상 이용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교통정체야 서울도 만만치 않겠지만, 매일 공사 지옥인 파리의 그것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거주민으로서는 이런 답답함과 불만이 자연스럽지만, 나름 도시·건축 분야의 ‘선수’이니 당국이 왜 그러는지 머리로는 이해한다. 시스템을 바꿔놓지 않으면 한번 일어난 문제는 반드시 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 서울. 거리를 걷던 중 한 펼침막 앞에서 나는 얼음이 되어 멈춰 섰다. 예전에 살 때는 신경 써본 적도 없던 문구였다. “잠깐! 쓰레기 불법투기, 당신의 양심을 버리시겠습니까?”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뒷머리가 서늘해지는 각성의 순간. 우리의 공공은 이렇게 일하고 있었구나! 세계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도덕’, ‘양심’, ‘국격’, ‘선진 국민’이라는 (이 땅에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국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들. 인간성에 호소하며 시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으로도 공공의 게으름은 슬그머니 숨겨진다.

1997년 <문화방송>(MBC) 교양프로그램 ‘양심 냉장고’가 큰 화제가 됐다. 한밤중 횡단보도 정지선에 홀로 멈춘 지체장애인의 양심적인 행동에 사람들은 감동했고 양심적이지 못했던 우리는 뜨끔했다. 그런데 파리 같은 서구 대도시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방송했다면 어땠을까? 아무도 안 지키는 질서를 의연히 지킨 단 한명의 ‘영웅’에게 환호했을까, 아니면 하룻밤 내내 겨우 한명만 지킬 정도의 수준인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당국에 비난을 퍼부었을까.

잘못된 시스템 위에서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이 책임소재를 눈 부릅뜨고 또박또박 따질 때 우리의 공공은 비로소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공공은 시민 모두가 조금 더 참견하고 더 소리쳐야 겨우 눈뜨는 게으른 곰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성화에 매일 도로를 뜯어고치는 파리는 서울보다 조금 더 빨리 겨울잠을 깬, 그 역시 게으른 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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