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 | 문화부 기자
어디까지가 존엄한 삶이고 어떻게 죽어야 존엄한 죽음인가 간절하게 질문을 던졌더니,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는 것 같다. 내 질문에 응답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이런 콘텐츠나 자료들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헷갈린다.
팔랑귀의 숙명인 걸까. 지난 6월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돼,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도 조력자살을 포함한 안락사 합법화 논의가 조만간 본격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러다가 나중에 신중히 ‘그날’을 결정하고도 “일주일만 미루면 안 될까요?” “하루만 더 생각해볼게요” “잠깐만 잠깐만” 변덕을 부리면서 진한 진상의 여운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는 거 아닐지 걱정된다.
일본 영화 <플랜 75>가 안락사 합법화의 ‘미끄럼틀’에 빨려들어갈 수 있는 고령화 사회의 그림자를 짚고 있다면, 개봉을 앞둔 프랑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안락사를 선택하는 개인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그린다. 80년대 ‘책받침 여신’ 소피 마르소가 안락사를 고집하는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꺼칠한 얼굴로 실무 처리를 하는 중년의 딸로 등장한다. 나이 든 여신과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보면서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영화 막바지, 안락사가 불법인 프랑스를 떠나 사설 구급차를 타고 스위스로 향하던 아버지는 국경의 한 휴게소에서 구급차 대원들과 식사를 하게 된다. 그때야 그가 스위스에 가는 이유를 알게 된 구급차 대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왜 죽으려고 하세요? 사는 게 좋잖아요?”
그때 아버지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이 가슴을 때렸다. 침묵했던 그가 하지 않은 말에는 이런 것도 있었을 것이다. ‘나라고 사는 게 좋았던 시절이 없었겠니?’ 문득 내가 꼭 영화 속 해맑고 ‘띨띨한’ 직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그들만큼 젊지 않지만, 그들과 똑같이 죽음에 대해 모르고 고뇌해본 적 없이 죽음에 관해 묻고 있었다.
안락사는 그 자체로 복잡한 사안이지만 안락사 찬반 논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찬성과 반대 사이에 놓여야 할 더 많은 토론과 합의와 변화들이 종잇장처럼 납작해져 있다.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경우의 수는 사라져버리고 스스로 죽을 권리를 행사할 것인가, 고통스럽지만 자연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앙상한 선택지만 남는다.
존엄사를 논할 때 주로 언급되는 건 생명유지 장치, 인위적인 영양 공급을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안락사다. 이는 죽음을 대하는 사회적 합의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이지만 개인의 죽음, 누구나 언젠가는 당면해야 할 과제를 미리 준비하는 차원에서는 너무나 빈곤한 메뉴판이다.
집에서 죽을 것인가, 시설에서 죽을 것인가, 완화치료는 어느 정도까지 받을 수 있을까, 집에서 죽는다면 완화치료를 얼마나 받을 수 있고, 방문 간병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치매에 걸린다면 내 삶과 죽음에 대한 권한은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을까… 나의 죽음 또는 부모의 죽음이 가까워져 오면 수백가지 질문이 머리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 답변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다못해 이미 제도화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만 해도 시스템 부족이나 의사들의 관성적인 진료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례가 자주 지적된다.
요양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과정을 기록한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의 권혁란 작가는 질긴 숨을 이어가면서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엄마를 위해 자식들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했다가 퇴원 요구를 당한 경험을 쓰고 있다. 법적으로 가족 등 보호자가 요청할 수 있는 권리지만 의사의 몰이해에 따라 손쉽게 외면된다. 이처럼 온갖 고통스러운 연명치료나 완전히 방치된 죽음을 맞는 사례들만 등장하니 ‘저런 꼴 보기 전에’ 나 스스로 죽음을 집행하고 싶다는 조바심이 드는 게 아닌가 싶다.
연명치료 전문가인 윤영호 서울대 교수는 책 <나는 품위 있게 죽고 싶다>에서 다양한 방식의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좁디좁은 수준의 웰다잉 정책에 변화가 없다면, 틀림없이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 및 의사 조력자살에 대한 요구가 강해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안락사나 의사 조력자살을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존엄한 죽음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안락사는 사실상 강요된 죽음, 사회적 살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어쩔 수 없이 어두운 고리를 두르고 있지만, 좀 더 나은 삶의 마지막을 맞고 싶다면 죽음을 자주 이야기하면서 이 고리를 거둬내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죽고 싶은지 지치도록 수다 떨고 무엇이 필요한지 토론하며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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