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북부, 서부, 동부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지난 9일 오후 제주시 애월읍 곽지해변을 찾은 피서객이 물놀이 등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말고]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백야는 고전문학의 제목으로 쓰인 덕에 낭만적인 요소가 있다. 열대야는 어떤가? 불면증이나 끈적끈적한 땀의 촉감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다. 제주의 기상기사는 6월26일의 “올해 첫 열대야 관측”에서 시작해, 8월23일 기상관측 이래 최다 기록인 “열대야 52일”을 넘겼고, 그 기록마저 경신 중이다. 8월15일은 하루 최저기온이 30.5도가 되면서 ‘초열대야’를 기록했다. 제주는 올해 정말 ‘이상하게’ 덥다. 와중에 열대야와 초열대야라는 단어를 만든 이가 날씨 박사라 불리던 일본의 구라시마 아쓰시 선생이라는 걸 알았다. 이분이 남겼다는 문장이 흥미롭다. “어느 시대나 ‘요즘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젊은이, 말, 날씨다”라며 “기후변화는 장기적 시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하셨단다. 50일가량 두 달에 걸쳐 이어지는 연속성 있는 기후라면 이것은 하나의 계절이 아닌가 싶다. 마치 장마처럼.
올해 제주는 마른장마이기도 했다. 빈장마라고도 불리는 계절어다. 30~35일의 기간 동안 15~20일 정도 비가 내리면 장마라고 한다. 한국의 계절은 봄, 장마, 여름, 가을, 겨울까지 4계절이 아니라 5계절인데, 올해 장마라는 계절을 제대로 겪지 못했으니 ‘빈’장마가 되었다. 장마의 어원을 살폈더니, 장마를 나타내는 ‘맣’이라는 고유어에 한자 길 장이 붙어 장마가 됐단다. 낯설지만 예쁜 단어다. 마른맣, 빈맣. 제5의 계절이 장마라면, 제주는 이제 제6의 계절에 열대야를 올릴 만하다.
열대야로 잠을 자지 못하는 나날이 지속되더니 바른 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더위에 그간 인연이라곤 없던 한라산 정상에 가겠다고 역시 잠을 자지 못해 판단능력이 흐려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성판악 코스를 올랐다. 숲의 비호를 받으며 직사광선을 피해 명랑하고 씩씩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진달래대피소에서부터 백록담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해발 1700m가 넘다 보니 큰 나무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태양과 점점 가까워지는 곳에서 그늘을 찾을 수 없는 엄혹한 상황이 정상 등반의 현실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록담을 향한 내 의지의 신호를 다리는 물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돌처럼 무거워지는 다리를 질질 끌며 한라산에서 돌이 되었다는 오백장군의 신화는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백록담이 등장했다. 내려오는 길은 더욱 잔인했다. 떨어진 체력 탓에 걷고 또 걸어도 출구가 나오지 않았다. 고장 난 다리를 겨우 달래며, 애초 이 상황을 만든 자신을 탓하다가,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은 한 계절 탓, 바로 열대야 때문이 아니냐는 기적의 논리를 세웠다. 산에 오르기 전과 후의 사람의 마음은, 더욱이 몸은 이렇게나 단순했다. 해발고도, 빛의 강도, 바람, 습도, 온도, 체력에 더해 물을 마시거나 휴식을 취했는지에 따라서도 컨디션이 분 간격으로 널을 뛰었다. 적정 온도보다 2~3도만 올라도 덥다고 호들갑을 떨며 잠들지 못하고, 일상 온도보다 조금만 추워도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이란 기후 앞에 나약하기만 하다. 등산이야 산이 있는 곳에 내가 가는 거라 통제가 가능하지만, 열대야도 폭우도 손쓰지 못하고 속수무책 당할 뿐이다.
역시 이번 여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고 결론 내리려다가 3년 전 여름에 비슷한 글을 쓴 것 같아 찾아봤다. 베를린으로 피서를 갔다가 예측 못 한 폭염 탓에 고생한 일을 적고 있었다. 3년 전 제주는 ‘이상하게’ 시원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과연 구라시마 아쓰시 선생의 말이 맞았다. 장기적 시야로 보자면 더울 때도 있고, 시원할 때도 있다. 곧 선선한 가을이 올 것을 안다. 가을이 오면 한번 더 한라산 정상에 오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열대야가 끝났어도 정신을 못 차린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