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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재난 때도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록 2022-08-22 18:04수정 2022-08-23 02:41

세종시 자율방재단 단원들이 지난 20일 충남 부여군 은산면 한 포도밭에서 14일 새벽 폭우로 유입된 토사를 치우고 있다. 부여군 은산면은 지난 14일 새벽 시간당 110㎜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농경지 121㏊가 유실·매몰되고, 주택과 상가 130여채가 부서지거나 침수되는 피해를 봤다. 연합뉴스
세종시 자율방재단 단원들이 지난 20일 충남 부여군 은산면 한 포도밭에서 14일 새벽 폭우로 유입된 토사를 치우고 있다. 부여군 은산면은 지난 14일 새벽 시간당 110㎜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농경지 121㏊가 유실·매몰되고, 주택과 상가 130여채가 부서지거나 침수되는 피해를 봤다.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김원철 | 디지털미디어부문장

정말 몰랐습니다. 이렇게까지 많은 비가 삽시간에 쏟아져 내릴 줄은. 지난 8일 서울 강남 일대는 하루 최대 381.5㎜ 폭우(동작구)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근래 찾아보기 힘든 어머어마한 양의 비였습니다. 저녁부터 슬금슬금 나오던 보도는 폭우가 본격화한 밤 9시 이후부터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보도 경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신문은 마감시간을 마지노선 삼아 (상대적으로) 오래 취재해 기사를 씁니다. 이렇게 작성한 기사들을 종합해서 이튿날 신문에 내보냅니다. 여러 기사를 하나의 묶음 상품으로 내놓는 거죠. 실시간으로 변하는 상황을 알기는 어려워도 숙성된 정보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뉴스 전달 플랫폼으로서 디지털은 정반대입니다. 마감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기사를 매 순간 마감합니다. 시간을 들여 취재하다가는 다른 매체에 첫 보도를 뺏길 수도 있습니다. 조각 기사들이 분절적으로 쏟아져나오고, 이 기사들이 타 언론사 기사와 수없이 많은 작은 전투를 치릅니다.

재난 상황은 이런 디지털의 속성을 극대화합니다. 쏟아지는 비, 실시간으로 변하는 피해규모, 들려오는 목격담…. 보도할 것투성이지만, 무엇 하나 차분히 들여다볼 시간은 부족하죠.

폭우 이튿날 아침뉴스 상황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시민이, 어떤 시민을 구조하는 모습을, 어떤 시민이 목격해, 어떤 게시판에 남긴 이야기’들이 확인 취재 없이 경쟁적으로 보도됩니다. 각 언론사 메인 홈페이지는 전날 밤 폭우가 남긴 피해가 스펙터클하게 강조된 기사들로 가득합니다. 물론 필요한 보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가 필요합니다. 재난의 실상을 알리고 사회적 공감과 대응책을 끌어내는 보도와, 재난을 전시하고 관음증적으로 소비하는 보도는 한끗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재난이 벌어지면 누구나 재난 그 자체에 압도됩니다. 경쟁이 심한 디지털에서는 재난의 그런 속성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좀더 강해집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주목해야 하는 건 재난을 극복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불가피한 재난을 일회적으로 만들어 일상을 이어가게 만드는 힘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하워드(47)씨는 반지하 참사 피해자 유족에게 매달 기부금을 전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반지하 참사 피해자 홍아무개씨의 사연을 접한 뒤 결정한 일입니다. 그는 반지하에 살던 시절 자신의 집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본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많은 ‘유하워드씨’가 이번 재난 속에 있었습니다. 덕분에 폭우 발생 10여일이 지난 지금 빠르게 일상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에서 네안데르탈인, 호모사피엔스 등 여러 인간종 중에서 호모사피엔스가 결국 살아남은 이유로 ‘다정함’을 꼽았습니다. 다른 종과 달리 공감하고 협력할 줄 알았기 때문에 진화에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은 대한적십자사 자연재해 성금 역사상 최고액을 경신하며 일본인들에게 마음을 내어주었습니다. 증오보다 다정함이 얼마나 더 강력한 본능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죠.

지난 18일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5회에서 우영우는 동료 변호사 최수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불가피한 재난(장애) 앞에서 인간은 절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은 ‘다정함’에서 옵니다. 폭우 이튿날 아침 <한겨레> 홈페이지 머리기사 제목은 ‘102년 만의 폭우…밤새 무사하셨습니까’였습니다. 재난이 비극적일수록 다정함이 절실합니다.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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