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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만 17세 노동자의 나라

등록 2022-08-17 18:44수정 2022-08-18 02:11

지난 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회의실에서 열린 ‘만 5살 초등학교 취학 학제개편안에 대한 영유아 학부모 긴급간담회’에 학부모들이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회의실에서 열린 ‘만 5살 초등학교 취학 학제개편안에 대한 영유아 학부모 긴급간담회’에 학부모들이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손아람 | 작가

“젊은이들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활동을 해야지, 할 일 없이 빈둥거려선 안 된다. (…) 교육을 받자면 돈이 많이 들어. 돈이 많이 들지 않거나 또 교육시킬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에 보내 공부시켜봤자 너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너는 세상과 맞닥뜨려 싸워야 해. 이런 싸움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지.”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주인공이 듣게 되는 충고다. 그래서 미성년자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주류상점에 취직해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주급 6실링. 하루 빵 한개와 버터 한조각을 사기에도 모자라는 돈을 받으면서. 산업혁명기 영국에서는 노동수요가 폭증하면서 미성년자 고용 역시 늘었는데, 특히 굴뚝 청소부나 탄광 채굴자 같은 험지 노동자 상당수가 미성년자였다고 한다. 임금은 적고 다루기는 쉬웠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소녀 면직노동자 17명이 화재로 타 죽은 ‘토머스 앳킨슨’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공장법이 도입됐고, 만 16세 이하 미성년자의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이 금지됐다. 한국은 불과 200년 만에 찰스 디킨스의 런던을 산업혁명 속도로 따라잡고 있는 것 같다.

박순애 교육부 장관이 사퇴한 뒤 정부의 취학연령 하향 시도도 철회되는 모양새다. 학부모와 교육단체의 강한 반발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만 5세 취학’ 적정성에 온통 관심이 쏠렸지만, 이 정책은 오히려 ‘만 17세 졸업’을 목표로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에 빨리 진입해야 하는 (노동)수요를 고려해야 한다”는 박 전 장관의 업무보고 브리핑, 취학연령을 1년 앞당기되 초중고 12학년제는 유지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는 하나의 약속된 관점을 드러냈다. 바로 만 17세 노동상품을 긴급 생산해 노동시장의 공급 부족을 메꾸겠다는 계획이다.

만약 정부 정책이 취학연령을 단순히 앞당기는 것이 아닌 유치원 등 보육과정 공공화를 통한 의무교육 확장 형태로 제시됐다면, 지난 논란은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 터다. 어쩌면 찬성파와 반대파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국가가 돈을 들여 책임지는 교육기간은 12년도 벅찼고, 국민이 교육을 마치고 사회로 출하되는 시점은 지금보다 빨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스스로 경제부처라고 생각하라”는 대통령의 요구처럼, ‘만 5세 취학’은 교육정책도, 복지정책도 아니었다. 경제정책의 일환이었다. 인간 노동을 창고의 재고품처럼 다루는 산업화의 열망을 이보다 노골적으로 담은 정책적 발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복무 기간을 만 5년으로 상향하는 정도면 비길 수 있을까.

2017년 선거연령 하향에 반대했던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고3을 무슨 선거판에 끌어들이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취학연령 하향 논란을 지켜보면서 그 발언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약 정부의 시도가 성공했다면 만 16세가 고3이 될 터다. 지금의 고등학생 또래가 선거판에서 배제되는 대신 노동판에 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는 국민은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는 유서 깊은 선거권 하향 반대 주장도 근거를 잃게 되지만, 정부 정책에서는 유기적이고 일관성 있는 밑그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국민을 국가를 구성하는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채굴하고 개발할 수 있으며 점진적으로 소모되는 산업자원으로 간주하는 까닭이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 존 에프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취임사였던 이 문장은 전체주의의 호소로 곧잘 오해되는 격언이다. 이 문장이 있는 그대로의 뜻이라면, 케네디의 연설은 21세기 미국은 물론 21세기 한국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너무 많이 묻고 또 너무 자주 요구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네디가 말한 뜻은 그 반대였다. 그는 자유를 억압당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약자들을 위해, 시민들이 국가에 모든 역할을 떠넘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만 17세부터 국가의 부강을 위해 노동해달라고 요구하는 나라는 이 연설의 사상적 지도 반대편에 위치한다. 나는 그런 나라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국가에 묻고 대답을 들었으면 한다. 이 나라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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