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8월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리다 분신한 노동운동가 최동의 운구행렬이 당시 모교인 성균관대 교정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장지로 떠나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김영희 논설위원실장
‘인간파괴’의 책임자를 처벌하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던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분신과 관련해 <한겨레>가 1990년 8월10일치에 쓴 사설 제목이다.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행정안전부 경찰국의 초대 수장 김순호 치안감의 과거 행적 논란이 불거지지 않았다면, 옛 기사를 찾아 그의 이름을 떠올릴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최동. 이란의 혁명지도자 호메이니에 빗대 ‘최메이니옹’이라 불릴 정도로 원칙주의자이면서도 다정다감한 문학청년이었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성균관대 4학년이던 83년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학내 시위를 주도해 실형을 선고받은 그는 복학 대신 노동 현장을 택했다. 소규모 공장을 전전하며 프레스공으로 일하며 88년 인노회(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 결성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상해, 너무 많은 걸 알아” 최동이 동생에게 남긴 말
89년 4월 그를 치안본부 홍제동 대공분실에 가둔 이른바 인노회 사건은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다. 노태우 정부 들어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구성죄가 적용됐던 이 사건은 판사가 노동단체에 해당한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하기도 했다.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온 건 2020년이었다. 연행 뒤 치안본부의 준비된 조직탄압 수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최동은 20여일간의 조사 과정에서 동료들이 피할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며 두차례 자해를 했다. 여동생 최숙희씨는 통화에서 “면회 끝엔 늘 오빠를 꼭 안아줬는데 그때마다 ‘이상하다, 너무 많은 걸 안다, 다 피하라고 해’라고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밀실에서 며칠씩 잠을 재우지 않는 정신적 고문과 안기부로 넘기겠다는 협박, 자해 등이 겹치며 송치 후 그는 실어증이 나타나는가 하면 심각한 우울증, 정신분열을 겪었다. “나를 죽이려 감방에 분말가루를 뿌린다” “주사기로 에이즈균을 투입했다” 같은 말도 했다. 외부 입원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은 묵살됐다.
89년8월에 최동의 가족들이 발표했던 호소문. 최숙희씨 제공
집행유예 뒤에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그는 종종 “저들의 목적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 나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폐인이 됐다”고 했다. 분신한 날 아침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다짜고짜 책상서랍을 뒤져 그의 메모를 가져갔다. 최씨는 “‘미제국주의와 치안본부의 00을 폭로한다’같은 제목만 어렴풋이 봤을뿐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어쩌면 오빠의 유서와도 같은 건데”라고 말했다.
최동이 아끼던 서클 한 해 후배이자 인노회 동료였던 김순호는 부천지역 조직책이던 89년 초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최근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언론 취재 등을 통해, 그가 그해 8월 경찰로 특채됐고 대공분야에서 근무하던 90년대 범인검거 유공 포상을 몇차례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그는 인노회 등 관련자 검거와 관련돼 정보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자신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주사파와 단절”을 위해 경찰을 찾아갔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상식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이다. 몇년 전 김순호는 90년 최동의 죽음 때 왜 안 왔냐는 지인의 물음에는 “당시 절에 들어가 경찰시험을 준비해 소식을 몰랐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행안부 초대 경찰국장 김순호 치안감. 경찰청 제공
아직 어떤 의혹도 단언할 일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때 가장 가까웠던 동지 중 한 명은 치안본부의 조사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하고, 다른 한 명은 대공경찰 특채 뒤 고속 승진을 해 그 치안본부의 부활로 불리는 경찰국의 수장이 됐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라는 말만으론 다 담을 수 없는 현실, 지금 역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민주화 ‘유공자’가 되지 못한 ‘관련자’ 최동
지난 7일은 김순호의 의혹이 기억을 소환한 최동의 32주기였다. 그는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등과 마찬가지로 아직 민주화운동 ‘관련자’일 뿐이다. 민주화운동·의문사 유가족들의 442일간 농성 끝에 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그들을 ‘유공자’라 부르지 못했다. 가까스로 처음 정권교체가 됐던 시절, 우리 사회의 합의 수준이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16대 국회부터 매번 그들을 ‘유공자’로 대우하는 법이 발의됐지만 폐기를 반복한 끝에, 최근 170여명 의원들은 2020년 우원식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민주유공자법’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4·19, 5·18 유공자법 선례에 맞춰 구속수감된 이까지 대상으로 삼았던 역대 법안과 달리, 2020년안은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미 ‘관련자’로 인정받은 이들 중 사망·행방불명·상이자로 대상을 대폭 제한했다. 전체 대상자는 829명, 유가족 지원까지 포함해 한 해 추산 예산은 12억원, 취업지원 대상인 30살 이하 자녀 또한 통틀어 5명 이하(유가협 추산)일 뿐이다. 그런데도 ‘운동권 특혜법’이라는 일각의 공격은 여전하다.
그들에 대한 예우를 언제까지 ‘관련자’ 같은 반쪽짜리 표현으로 두는 게 맞는 일일까. 지금 당연시되는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것도 아니고, 늘 흔들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법은 과거 민주화 희생자의 ‘명예’를 위한 것을 넘어, 그들을 온전히 기억하며 우리 사회가 다시는 그런 시절로 퇴행하지 않겠다는 현재의 약속이자 다짐일 것이다. 그 약속을 윤석열 정부나 여당 또한 더 이상 외면할 이유나 명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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