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랄 솔베리, <여름밤>, 1899, 캔버스에 유채, 114×135.5㎝,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크리틱]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하늘색의 표현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와 <너의 이름은.>에서 관객이 꼽는 최고의 경이적인 순간은 소식을 알 수 없이 떨어져 지내던 주인공들이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이다. 철길을 사이에 두고 길을 건너다가, 혹은 올라가고 내려가는 계단에서 성인이 된 소년과 소녀는 흠칫 걸음을 멈춘다. 무의식이 운명의 상대를 알아본 그 순간을 신카이 감독은 어떤 하늘로 나타냈을까?
그의 애니메이션에서 하늘은 그저 배경이 아니다. 구름 사이로 신비로운 빛이 곳곳에 퍼져 있는 하늘은 주인공의 마음 상태에 따라 청색, 옥색, 주황색, 그리고 가끔 연분홍색이나 보라색으로도 변한다. <언어의 정원>(2013)에서는 하늘이 초록빛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실상 비 오는 날 하늘은 잿빛에 가깝겠지만, 주인공 소년이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여인과 만나는 날 하늘이 음침한 회색일 수가 없다. 비 오는 정원의 초록 하늘은 소년의 마음 상태를 촉촉하고 윤기나게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칠월 말 팔월 초, 한여름 밤의 하늘은 어떤 색일까. <절규>를 그린 에드바르 뭉크로 유명한 노르웨이에는 백야가 있다. 뭉크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것과 달리 그와 동시대에 같은 나라에 살던 하랄 솔베리(Harald Sohlberg, 1869~1935)는 낯설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는 국민들에게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손꼽힌다. 해가 진 하늘빛을 그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가깝게 캔버스에 옮겨놓았기 때문이리라.
어느 해 휴가 중에 자정이 가까워져도 여전히 파랗고 환한 백야의 하늘 아래 있어 봤다. 정신과 몸은 이미 밤을 감지하고 자연스럽게 어둠을 기대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현실은 밤이 아니었다. 하늘에는 햇빛이 가득한 가운데, 하얗고 투명한 달이 동시에 떠오르는 여름밤의 풍경은, 저녁 8시 무렵이면 하지에도 어스름이 깔리는 나라에서 평생 살던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초현실적이었다.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빛의 제국>에서처럼, 반은 낮이고 반은 밤인 세상, 그리고 낮의 하늘과 밤의 땅이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솔베리가 1899년에 완성한 <여름밤>이라는 풍경화에는 백야의 분위기가 하늘빛에 감각적으로 녹아 있다. 호수와 숲에는 이미 밤이 드리워져 있지만, 하늘의 끝자락은 아직 이상스럽게 환하다. 그림의 반을 하늘이 차지하고 있는데, 왼쪽에서는 파랑이 초록으로 번지고, 가운데 부분에서 약간의 노랑으로 퍼져나가다가 오른쪽 끝에서 흰색으로 사라져간다. 찬란한 붉은빛으로 대기를 물들이며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초저녁의 석양이 아니라, 붉은 기운이 없이 어슴푸레하게 사그라지는 푸른빛이다. 석양을 보며 감탄과 동시에 허무함을 절감한다면, 그와 대조적으로 노르웨이 백야의 빛은 어둠을 끌어안고 절정의 순간 없이 지속된다.
한여름에는, 백야가 아닌 나라에서도 비현실적인 경험을 하기 쉽다. 바깥 온도가 체온과 맞먹을 만큼 올라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듯 시간개념이 없어지고, 여기가 어디인지 아련한 기분이 드는 때가 있다. 멀리 여행을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마치 밤낮이 바뀌는 시차라도 생긴 듯 낮에는 내내 졸음이 쏟아지고 밤에는 잠을 설친다. 그렇게 몽환적인 계절에 겪었던 사건이나 인연은 훗날 돌이켜보면 꿈이었나 싶게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한여름에 우리는 현실과 비현실이 살짝 교차하면서 평소와는 다르게 두 겹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놓이는 듯하다. 그런 시기에는 잘 버티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하늘이 하늘색으로 보이지 않고, 방울방울 어지러운 증상이 생겼다면, 휴가를 떠나거나 쉬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