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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고의 생산성 발휘

등록 2022-07-28 18:05수정 2022-07-29 02:37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10분밖에 기억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주인공인 <메멘토>라는 영화가 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뭘 잘 까먹어서 스스로 ‘메멘토’ 같다고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우산을 잃어버리거나 지갑을 잊고 나오는 일은 흔했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중 분명 번뜩이는 뭔가를 떠올리고 쾌재를 부르고 기뻐한 뒤 금세 휘발되어 기억나지 않아 안타까워하던 것도 여러 번이다. 기막힌 작품이 될 수도 있었는데,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 발상이 허망하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메모하고 일기를 쓰며 기록했다. 그러나 일기를 쓰고 다시는 들춰보지 않듯 제대로 메모를 활용해 본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저 메모하며 자신에게 다시 인지시키는 정도였다. 여러모로 디지털기기와 도구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런 애플리케이션들은 대부분 ‘생산성’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생산성의 정의는 ‘얼마나 적은 투입물로 양질의 산출물을 얻었는가 효율성을 나타내는 지표’다. 참으로 자본주의를 사는 현대인의 강박이 느껴지는 단어다. 나는 생산성을 잘 발휘하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생산성을 발휘하며 살아야 하는가. 인터넷서점에서 ‘메모’나 ‘생산성’이라고 검색만 해봐도 관련된 수백권의 책이 나온다. 메모 애플리케이션인 에버노트나 노션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관련된 강좌들도 많다. 그 강사들은 그 많은 기능을 활용해서 과연 얼마나 생산적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최근에는 ‘제텔카스텐 메모 기법’을 기반으로 한 ‘옵시디언’이라는 메모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흥미를 가졌다. 제텔카스텐은 독일어로 ‘메모 상자’라는 뜻으로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소개한 방법인데 메모를 분류해 관리하고 메모끼리 연결성을 강조하는 기법이다. ‘지식관리 기법’과 ‘제2의 뇌’라니 호기심이 동했다. 옵시디언은 메모들끼리 연결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역시 유튜브에 강의가 있어 차근차근 기능들을 배워봤다. 동영상을 보다가 기능을 배우는 게 더 일이 크겠다 싶었다. 나는 이 수많은 기능의 10분의 1도 활용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마치 먹는 양보다 살을 발라내는 데 칼로리를 더 소모하는 갑각류를 먹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한번 배워보려고 낑낑댄 것은 항상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가령 화면에 있는 텍스트를 읽어주는 음성합성(TTS: Text To Speech) 기능이 없었다면 나는 출간할 정도로 긴 분량의 글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끔 이런 생산성 도구의 홍수 속에서 나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마치 인간이 잠재된 뇌의 10%밖에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내 잠재된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현대인의 강박을 느낀다. 어쩌면 그런 건 허상일 수도 있다.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만년필로 쓴 수백장 원고를 방바닥에 발 디딜 틈 없이 펼쳐 놓고 촛불에 의지해 편집하는 장면을 보면서 노트북과 워드프로세서의 시대에 사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렇다고 전기도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던 그 옛 시대에 작가들이 더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했던가. 옛 작가들이 노트북도 없던 시기에 그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킨 것을 생각하면 겸허하고 경탄스러운 마음이 든다. 어쩌면 그 시대의 작가들은 쏟아지는 콘텐츠의 홍수와 번잡한 세상의 욕망과 유혹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적어 더욱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진정 생산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배우는 게 아니라 에스엔에스(SNS)와 유튜브 애플리케이션을 지워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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