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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법의 한계와 사람의 마음

등록 2022-07-24 18:21수정 2022-07-25 02:39

1㎥ 철제구조물 안에서 하청노동자의 임금인상과 하청노조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며 30일째 스스로 몸을 가둔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파업 협상 타결 하루 전인 지난 21일 오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파업 현장 안 구조물에 앉아 있다. 거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1㎥ 철제구조물 안에서 하청노동자의 임금인상과 하청노조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며 30일째 스스로 몸을 가둔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파업 협상 타결 하루 전인 지난 21일 오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파업 현장 안 구조물에 앉아 있다. 거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세상읽기]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

영화 <큐어>를 봤다. 명불허전, 오래간만에 정말 무섭다고 느꼈다. 영화에서는, 선량하고 성실한 보통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몸에 칼로 엑스자를 깊이 그어 그들을 죽인다. ‘보통의 사람들, 주변인들을 살해, 엑스자 방식의 칼질’. 이러한 공통점 외엔 어떠한 접점도 보이지 않는 살인사건들을 수사하던 형사는 간신히 ‘엑스자 살인’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엑스자 살인이 일어나기 전, 살인범들은 모두 한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로부터 최면에 걸렸다는 점이다. 마침내 최면술사를 대면한 형사, ‘그는 과연 최면술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통속적인 질문을 던지며 영화는 계속 진행된다. 영화를 다큐로 보아 저토록 강력한 최면이 가능한가부터 고민하기 시작하면 김새겠지만, 모든 것을 은유와 상징이라고 놓고 보면 비현실적 설정 속에서 통찰이 빛난다. 영화에서는 특히 소음이 신경에 거슬리고 무섭지만, 그와 별개로 섬뜩하다고 느낀 부분은 따로 있다.

타자화와 치환된 납작함의 강력함이다. 극 중 정신과 의사는 최면에 의한 살인교사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최면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 사람의 근본적인 윤리관을 바꿔놓지는 못해. 즉, 살인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최면을 건다고 그 사람이 갑자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하지만 최면술사는 누구에게도 죽이라고 최면을 걸지 않았다. 그저, 견딜 수 없을 만치 자신의 신경을 긁는 누군가를 엑스표 그어 지워버리라고 말했을 뿐. 누군가의 몸에, 목 부위에서부터 가슴을 지나 복부에 이르기까지, 칼로 엑스표를 깊게 그을 경우, 그 사람은 죽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최면은 문제에 엑스표를 그으라고만 행해졌고, 최면에 걸린 이들도 이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살인범은 엑스표를 꼼꼼히 그은 뒤 죽은 피해자를 발견하고 패닉에 빠진다. “죽인다는 생각은 없었어.”

재판을 하면서도 절실히 느끼는 지점이다. 공소장에 기재된 문장은 건조하다. “오른손 주먹으로 얼굴을 수회 때리고 두 손으로 목을 졸라 전치 4주의 상해를 가하였다.” 죄명 상해, 피해는 전치 4주, 피해자와 합의되었는가 등을 체크하며 수학문제 풀듯 양형 기준을 적용한다. 이 사건의 권고형은, 어디 보자, 징역 1년에서 3년 사이군. 이 과정에서 그 당시 피해자가 느낀 공포, 그 사건이 피해자의 삶에 남긴 상흔, 상해 완치 이후에도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 그로 인한 삶의 변화 등은 삭제된다. 최근 이러한 삭제를 막아보고자 가급적 피해자가 법정에서 진술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무죄이지만 도덕적으론 강력하게 비난받아 마땅한 사건들과 유죄이지만 차마 도덕적으론 비난할 수 없는 사건들이 부지기수이기도 하다. 즉, 법은 삶을 사실관계와 법리로 분석하면서 이를 대상화하고 납작하게 치환한다. 이처럼 한계가 명백한 법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삶이 건조한 법적 문장으로 치환되어 납작해지다 못해 지워질지도 모른다. 목에서부터 가슴을 지나 복부에 이르기까지 칼로 깊이 베여 피가 철철 흐르는 사체 앞에서 ‘나는 문제에 엑스표를 그었다’고 건조하게 설명하는 사회 말이다.

온갖 문제가 죄다 재판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는 저 문제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실감할, 불법과 합법, 유죄와 무죄 사이의 넓은 간극이 어떠한 방식으로 헤아려질까 고민하던 중,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속 대사 하나가 맘에 박혔다. “법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난 3년간 지극한 불황 속에서 임금이 삭감되어 고통을 분담했던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업계의 활황기와 유례없는 고물가 시대가 동시에 오자 임금 회복을 외쳤다. 그러다 결국 작업장을 전면 점거하고 그 안에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어 여름 한달 넘게 옥살이를 했다. 그 쟁의행위의 적법성을 판단할 때, 법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할까. 법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입장에서 사회의 모든 문제가 법으로 재단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그 모든 문제를 다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법이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공부할 다짐이라니, 좋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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