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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뒤에 있는 사람

등록 2022-07-21 18:25수정 2022-07-22 02:35

뒤에 서 있는 이름 모를 사람이야말로 오늘 내 삶을 지탱해주는 진짜 귀인인지도 모릅니다. 사진 김완
뒤에 서 있는 이름 모를 사람이야말로 오늘 내 삶을 지탱해주는 진짜 귀인인지도 모릅니다. 사진 김완

[삶의 창] 김완 | 작가·특수청소노동자

머리 닿는 곳에 세면대가 달린 의자에 앉자 전동 등받이가 스르륵 뒤로 밀려납니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영광스러운 자리, 타인이 머리를 감겨주는 황송한 시간입니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에 이르도록 물을 잠시 흘려보낸 뒤에 손가락 끝을 쟁기처럼 세워서 머리 구석구석에 향기로운 밭고랑을 만듭니다. 한순간 머리통을 둘러싸고 온갖 도발과 침범이 일어나지만 귀 안쪽으로는 물이 들이치지 않습니다. 수건으로 가려져 눈앞을 보지는 못해도 지금 뒤에 계신 당신만은 철석같이 믿게 됩니다. 숙련된 손길에 어느덧 긴장이 사라지고 마애불의 눈썹처럼 깊고 신실한 평화가 내 이마 위에도 밀려옵니다. 이 순간, 교리 없는 종교와 숭배 없는 신앙이 미용실에 있습니다.

제법 규모를 갖춘 미용실에는 배경처럼 수습사원들이 서 있습니다. 헤어디자이너가 가위와 빗, 트리머 따위로 손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동안 뒤에 서 있다가 눈치껏 어깨 위에 앉은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다음 과정이 순조롭게 이어지도록 그때그때 걸맞은 도구를 내밉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시선은 동작 하나라도 놓칠세라 시종일관 선배의 손을 따라다니기 바쁩니다. 마침내 그 손이 멈추면 샴푸 의자로 안내해서 머리를 감기는 것은 수습사원의 몫입니다.

“글쎄요. 하루에 열다섯 명쯤 되려나? 제가 수습일 때 손님들의 머리는 그 정도 감긴 것 같아요.”

예약제로 손님을 받아 혼자 모든 과정을 감당하는 단골 미용실 디자이너는 갑자기 건넨 질문에 고생대의 기억이라도 떠올리듯 먼 곳을 보며 가물가물 대답합니다.

하루에 열다섯 명이라면 어림잡아 일주일에 백 명, 한 달이면 사백 명, 일 년에 오천 번쯤 누군가의 머리를 대신 감아온 것입니다. 서툰 암산을 마치자 뒤에서 드라이어로 내 머리를 말리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샴푸 의자에 앉은 자가 누리는 오 분의 안식을 위하여 미용사는 얼마나 많은 이의 머리를 감으며 실력을 가다듬어 온 걸까요?

돌아보면 우리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승용차 뒤에 서서 좀 더 다가오라며 창문 안에서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외치는 식당 주차요원, 아이 뒤에 서서 함께 손을 흔들며 부모를 배웅하는 어린이집 선생님, 주사기와 메스, 카테터 같은 도구가 든 쟁반에서 매 순간 가장 요긴한 것을 골라 집도의에게 건네는 수술실 간호사, 오가는 주민들 뒤에서 계절이 바뀔 때면 꽃과 나뭇잎을, 겨울이면 눈을 빗자루로 쓸어 모으는 아파트 경비원, 번잡한 화장실에 소리 없이 들어와 바닥의 물을 닦고 휴지통을 비우고 사라지는 청소부….

어떤 세월을 거쳐서 그 자리에 있는지 사연 하나하나를 알아낼 재간은 없지만, 지금 그곳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단 일 초도 순탄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계의 안녕을 지탱해온 것은 앞장선 사람보다 뒤에 서 있는 누군가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뒤에도 누군가 서 있겠지요. 혹시 아나요? 대중교통을 기다리다가 내가 갑자기 쓰러진다면 그 순간 붙잡아줄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당장 뒤에 서 있는 이름 모를 사람일지. 우리 인생에 귀인이 있다면 바로 뒤에서 나를 향해 서 있는 그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 있기에 우리는 스스로 인간(人間)이라 부릅니다. 당신 또한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일 테지요. 오늘 당신이 지탱하고 지켜봐 주는 앞에 계신 분은 누구인가요?

힘들 때면 한 번쯤 뒤돌아보세요. 이름 모를 위대한 사람이 거기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날은 가위와 젖은 걸레와 빗자루를 손에 쥔 채, 또 어떤 날은 내 뒤에 줄을 서서 함께 버스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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