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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탁환 칼럼] 가물 때는 우산을 이야기하라

등록 2022-07-19 18:18수정 2022-07-20 02:39

구비문학 전공자인 최 교수가 제안했다. 말은 힘이 세니, 지금처럼 가뭄일 때는 비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나누자고. 비금도보다 작은 열군데 섬을 돌며 고민한 우산 이야기 하나를 먼저 내게 펴 보였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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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 소설가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도에 다녀왔다. 광주교육대학교와 전라남도교육청이 힘을 합쳐 만든 ‘섬으로 찾아가는 글쓰기 교실’ 담당 강사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한시간을 달려 하루 일찍 섬으로 들어갔다. 7월의 섬을 걷고 싶었다.

최원오 책임교수와 함께 염전을 지나고 농수로를 건너자마자 논을 가득 채운 벼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물이 부쩍 줄었거나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를 볼 때는 한숨부터 나왔다. 보름만 더 가물면 올해 벼농사를 망치겠다고 하자, 말로 하는 문학, 즉 구비문학 전공자인 최 교수가 제안했다. 말은 힘이 세니, 지금처럼 가뭄일 때는 비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나누자고. 비금도보다 작은 열군데 섬을 돌며 고민한 우산 이야기 하나를 먼저 내게 펴 보였다.

여덟시간 글쓰기 수업에서 빠뜨리지 않는 내용이 미래를 쓰는 것이다. 학생들 각자의 미래와 함께 지금 살고 있는 섬의 미래까지 쓰도록 했다. 많은 학생이 섬을 떠나 육지에서의 나날을 다양하게 적었다. 섬의 미래에 관해서는 두가지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하나는 섬이 지금처럼 맑은 바다와 푸른 숲을 간직하면 좋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료시설이 증설되면 좋겠다는 것이다.

“큰바람과 장대비를 섬이 거의 맨몸으로 맞아왔다는 거야. 비금도와 암태도에 병원이 있긴 해도, 학생들이 원하는 최신식 종합병원은 말하자면 더 크고 안전한 우산이겠지. 육지에선 흔하지만 섬에선 너무나도 귀한!”

우리는 방풍림 흔들리는 그늘을 훑으며 신안군의 섬들을 덮는 거대한 우산을 떠올렸다. 내 차례였다. 나도 평생 간직하고픈 우산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도시 어린이들이 농촌 들녘을 답사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벼를 직접 키워보겠다고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광주광역시 신용초등학교 동아리 ‘나는 생태학자다’의 요청을 받고, 곡성의 흙과 모를 가져간 날은 지난해 6월16일이다. ‘한평 논’이라고 불리는 고무대야들에 다섯 품종의 모를 나눠 심은 뒤, 7월2일 풍년새우와 왕우렁이를 담아 학교로 다시 갔다. 논에 사는 생물들과 함께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학생들은 벼가 얼마나 자랐는가를 잰 뒤 생각과 느낌을 글과 그림에 꾸준히 담았다.

7월6일은 새벽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하교할 즈음 ‘나는 생태학자다’ 회원인 4학년 학생만 학교 텃밭으로 향했다. ‘서시1호’란 벼 품종을 심은 한평 논에 도착한 학생은 우산을 쥔 양팔을 벼 위로 쭉 뻗었다. 업무지원팀 교사가 비를 온통 맞고 선 학생을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갔다. 우산을 논에 양보한 이유를 묻자 학생이 답했다.

“풍년새우를 지키려고요.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면 물이 차오르다가 넘칠 거잖아요? 풍년새우가 한평 논 밖으로 떨어지는 걸 막아야죠.”

교사는 대야에 구멍을 뚫어 빗물이 넘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학생은 논을 덮었던 우산을 제 어깨에 걸치고 학교를 떠났다.

최 교수와 나는 흐린 하늘을 우러렀다. 빗방울이 손등에 떨어진 것이다. 비가 더 내리기를 바라며, 비금도와 다리로 연결된 도초도 수국정원을 걸었다. 꽃잎에 듣는 빗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자주 멈춰 섰다. 귀를 기울였지만 고요했다. 등에 땀이 흐르자 나는 또 우산 이야기를 잊고 가뭄 걱정을 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이 가뭄은 아니다. 자신이 사는 마을, 자신이 기르는 생물을 위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가뭄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비금동초등학교로 향했다. 전교생 스무명이 강의실에 모였다. 내가 쓴 유일한 동화에 등장하는 한국호랑이 이야기로 수업을 시작했다. 진도에서도 호랑이가 살았다고 하자, 학생들 눈이 반짝였다.

학생들이 적어낸 질문 가운데 ‘글은 어떻게 쓰느냐’는 물음이 눈에 들어왔다. 글 잘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요청은 여러번 받았지만,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글이란 걸 도대체 어떻게 쓰느냐는 질문은 드물었다. ‘영혼은 어떻게 성장하느냐’처럼 오래 곱씹어야 하는 문제다. 곁으로 가라고, 곁을 내준 생물 혹은 무생물과 시간을 충분히 보내라고 지금까진 충고했다. 그러나 비금동초등학교에선 동문서답을 했다. 가물 때 비를 바라는 기도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비로소 깨달았다고.

학생들은 잠시 방그레 웃다가, 비금도에 한국호랑이는 없지만 엄청나게 힘센 용이 산다고 앞다투어 자랑했다. 학교 뒤 용소저수지에서 비 오는 날 용이 승천하다가 성치산 바위에 부딪혀 구멍을 냈으니 같이 가서 보자는 것이다. 우산 스무개를 한꺼번에 펼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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