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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필리핀 인권활동가 세실을 기리며

등록 2022-07-14 18:17수정 2022-07-15 02:4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황필규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15년 전 필리핀 마닐라 인근 수출자유지역을 방문했을 때 세실 투이코를 처음 만났다. 어느 한국 중견기업의 자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를 조사하기 위한 출장길이었다. 그는 봉제공장들이 몰려 있는 그 지역 노동자지원센터에서 노동자들에게 법률 지원과 지도자 교육 등 연대활동을 수행하는 활동가였다.

‘무노조-무파업’ 원칙(?)이 지배하던 이 지역에서 노동자들은 어렵게 노조를 만들었고, 회사 쪽 소송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 그 노조의 적법성을 인정받았고, 법적 절차에 근거해 단체협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회사 쪽은 단체협상을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한 노조원 전원을 해고했다. 회사 밖에서 밤샘농성을 하던 두 여성 노동자가 괴한에게 납치돼 수출자유지역 밖 도로변에 버려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필리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십건에 이르는 관련 진정, 소송사건에 관해 설명을 듣고, 필리핀 노동 관계 법령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회사 쪽 대표, 노동부 차관, 국가인권위 조사관 등과 만났고, 관련 단체, 노조원, 그리고 납치 피해자 등과도 면담했다. 수출자유지역, 파업 현장, 납치 현장 등을 답사하기도 했다.

주도면밀함과 인내심을 갖고 오랜 기간 노동자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헌신하는 세실과 그 단체의 모습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하기 어려운 냉정한 현실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한국 기업 문제인데 한국 쪽에서 뭔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기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뒤 다른 일로 필리핀으로 출장 갈 때에도 가급적 그를 만나 수출자유지역 한국 기업의 인권침해 상황을 확인하고 도움 될 수 있는 부분이 없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2013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해외 진출 한국 기업 인권침해 실태조사의 하나로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도 그의 도움을 받아 6개 한국 기업 50여명 노동자를 인터뷰했다.

최저임금도 보장되지 않고 안전장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안전사고와 직업병에 노출되는 현실, 휴식시간이 제때 주어지지 않거나 서서만 일하게 하는 등의 극단적인 작업환경, 성폭력·성희롱 등 인권침해 발생 때 처리 절차의 부재, 견습생 대부분이 16~17살 여성인 현실 등 생각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실은 차분하고 묵묵하게 이런 인터뷰 전체를 준비하고 지켜봤다. 노동자들의 그에 대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어와 영어로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 널리 알리겠다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과연 상황 변화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당장 희망이 보이지 않고 점점 노동자들의 여건이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노동자들과 수다를 떨며 해맑은 미소를 보였던 그를 기억한다.

2014년 말에는 세실의 단체가 주도하는 현지 노조지도자들을 위한 기업과 인권 국제메커니즘 워크숍 강사로 초대받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이드라인에 입각한 진정 절차를 강의할 기회를 가졌다. 쉬는 시간에는 장난과 농담을 하며 꿈 많은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막상 사업장 현실을 얘기할 때에는 한없이 진지하고 어두워지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리고 늘 그들 곁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나갈 세실이라는 존재가 다시 한번 크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는 거의 기억이 없다. 세실이 소속된 단체의 노조활동가 교육이 성공적이었다고 전해 들은 다른 단체의 요청으로 그다음해에 다시 교육하러 필리핀을 방문했던 기억은 있다.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몇몇 한국 기업 노동자들의 탄압 사례가 공유된 것 이외에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의 건강이 좋지 않고, 필리핀과 수출자유지역 노동 상황이 점점 더 악화하고 있다는 얘기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며칠 전 세실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수십년간 한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때론 한없이 단호했고 때론 한없이 부드러웠던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논의가 시대를 풍미하고, 기업의 인권 책임 법제화가 진지하게 논의되는 현실은 세실과 같은 이들의 삶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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