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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국의 능력주의, 미국의 능력주의

등록 2022-07-14 18:17수정 2022-07-15 02:37

미국 하버드대학교. 위키미디어
미국 하버드대학교. 위키미디어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2008년 한국계 교육심리학자 새뮤얼 김은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에서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교육 갈등’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 제출했다. 미국 14개 명문대의 학적부 약 20년치를 조사한 그는 한국계 학생의 중도탈락률을 44%로 계산했다. 다른 어떤 민족 출신보다 높은 탈락률이었다. 한국인 교육열의 초라한 성과를 보여주는 이 연구는 주기적으로 한국 언론에 소개됐다. 제목이 가리키듯 연구 대상이 재미 교포들이므로 한국 실정에 바로 대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한국 학부모나 교포 1세대나 교육관이 다를 거로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체 미국 대학생의 중도탈락률은 40%가 넘는다. 그런데 명문대에서는 그렇지 않다. 현재 하버드대학교 홈페이지는 입학생의 98%가 무사히 졸업한다고 선전한다. 이보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2021년의 조사는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중도탈락률을 10~15%로 추산했다. 그곳에서 44%가 탈락한다는 한국계 학생들과는 동떨어진 수치이다.

왜 한국인(계)은 이런 실패와 낭비를 하는 것일까? 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느낌만 얘기해 본다. 한국의 능력주의는 미국의 그것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한국인이 시험을 생각하는 관점은 ‘입성’(入城)이다. 일단 죽을힘을 다해 문턱을 넘으면 그 뒤에는 마감을 끝낸 사람처럼 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슬쩍 들어오는 이도, 나가는 이도 없도록 성문은 굳게 닫혀야 한다. ‘일단 들어가면 더 따지지 않고 닫히는’ 이 시스템은 계급 상승의 엘리베이터 역할을 했다. 이게 암묵적인 사회계약이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졸업정원제가 몇년 버티지 못하고 철회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이게 좋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입성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최적화된 전략은 입성에 에너지의 99%를 소모한 뒤, 성안에 들어와서는 숨만 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몇년 전 명문대에 입학한 뒤 무기력증에 빠진 학생들을 다룬 기획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순도 높은 한국 학생이다.

명문대 졸업장이 하나의 신분증명서이고 이를 획득하려는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은 계급전쟁의 종료 시점이 한국 기준보다 몇년 뒤(졸업)로 돼 있는 것이다. 그 간단한 트릭에, 이미 기력을 소진한 채 입학한 한국계 학생들이 고전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를 타개할 묘안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게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미국 학자 팀 레닉은 2010년대 통계 분석을 통해 미국 대학생들의 중도탈락 주원인은 공부의 실패가 아니라 재정적 어려움이라고 결론내렸다. 학비가 비싼 명문대의 중도탈락률이 낮다는 것은, 학생들 가운데 재정적으로 어려운 계층 출신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우리는 이 문제를 ‘부모의 욕망과 부작용’이라는 좁은 틀로만 봐온 것 같다. 44%의 한국계 탈락자 중에 학비 조달이 어려웠던 학생도 있을 것이라는 분석은 한국 언론에서는 찾기 힘들다. 등록금 마련에 쩔쩔매는 친지 한두 명쯤 떠올리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미국 시스템을 완전한 능력 제일주의라고 보기도 어렵다. 아이비리그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시험 합격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며, 노골적으로 동문 자녀를 선호한다. 즉 미국 주류 지배계급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에 충실하다. 아마 교포들은 아이비리그의 본질을 오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움이 많은 소수민족으로서 한번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느꼈을 뿐 아닐까. 다만 그들은 자녀들이 이미 공부에 지쳐 있는 점과, 세습된 문화자본이 그곳에서 얼마나 필수적인지와, 그 막대한 학비를 조달하지 못할 위험을 과소평가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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