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아는 척할 기회가 오면 가슴이 뛴다. 야외 답사를 위해 20대 10여명을 이끌고 가는데 어떤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공교롭게 며칠 전 지인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여러분 뒤의 건물을 봐주세요. 지금은 식당이나 카페가 많지만 사이사이 보세 가게들이 보이죠? 여기가 90년대 힙스터들이 싸고 특이한 옷을 사려고 즐겨 찾던 곳이랍니다.” 일행은 멍한 표정이었고 인솔팀장이 끼어들었다. “선생님, 보세가 뭔지 알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으면 가슴이 좀더 빨리 뛴다. 분명 나는 보세 가게를 열심히 들락거렸다. 백화점, 브랜드 매장,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옷을 살 수 있는 곳. 그런데 보세가 뭐냐고? “저도 정확한 뜻은 모르는데, 주로 외국 스타일의 옷을 쌓아놓고 파는, 그러니까 ‘보따리 세일’ 같은 느낌인데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뱉었고 인솔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보세. 보따리 세일! 줄임말의 원조 같은 거네요?” “아니요. 그건 제가 지금 만든 말이고….” 하지만 수습할 기회도 없이 일행은 다음 장소로 움직였다.
틀린 말을 했는데 믿어버리면 가슴이 미치도록 뛴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필사적으로 보세의 유래를 찾았다. 다음 목적지에 집결하자마자 손을 들고 외쳤다. “잠깐만요! 제가 아까 거짓말을 했어요. 보세는 보따리 세일이 아니라 ‘보류 관세’의 준말이래요. 수출을 위해 관세를 보류한 의류 제품들을 빼돌려서 판매한 거래요.” 날씨는 몹시 더웠고 청년들은 무표정했다. 대부분은 내가 했던 말 자체를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십원짜리 동전의 다보탑을 꼼꼼히 보라고 했다. “탑 아래 글자를 찾아보세요.” 지금과는 디자인이 달라 ‘김’이 누운 모양이 선명히 보였다. “탑을 만든 김대성이 자신의 성을 집어넣은 거랍니다.”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얼마 전 친구에게 바보 취급을 당했다. “그땐 한글이 없었을걸?” 선생님은 다보탑을 흥미롭게 설명하려고 이야기를 꾸민 뒤에 그게 거짓이라는 걸 밝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흥미로운 지식만 기억했던 거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식이 있다. 기상천외한 사실인데 감정까지 건드리면 귀가 쫑긋해진다. “침팬지에게 인간 수화를 가르쳤더니 처음 한 말이 ‘날 풀어줘’(Let Me Out)였대.” “아기가 100일 전후로 갑자기 울고 보채는데, 자신이 배 속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래. ‘원더 윅스’(Wonder Weeks)라고 하지.” 술자리, 강의실, 방송에서 이런 지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대화를 주도하며 인기를 얻는다. 요즘엔 에스엔에스(SNS)가 주요 유통 창구가 되고 있다.
내 마음속 똘똘이는 아는 척을 즐기지만 남들의 아는 척엔 안경을 치켜올린다. 특히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지식’은 의심부터 한다. 다행히 세상엔 나보다 훌륭한 똘똘이들이 많고 사이비 지식을 검증하는 사이트도 있다. 침팬지 와쇼는 인간 아이처럼 키워졌는데 ‘너 나 나가자!’(You Me OUT!)라며 옷을 챙겨 입었단다. 자유를 갈구하기보단 놀러 가자는 말이 아니었을까? 영국 <가디언>의 ‘육아 조언 사업의 악마적 천재성’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원더 윅스의 연구자는 박사과정생이 이 이론의 실험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후속 연구를 발표하려 하자 이를 막다가 대학에서 해고됐단다.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이다음에 온다. 이런 ‘재미없는 진실’은 ‘매혹적인 거짓’을 쉽게 이기지 못한다. 지식인, 전문가들이 그런 거짓을 천연덕스럽게 퍼뜨리며 장사에 나서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부끄러움을 알고 내 심장은 거짓말을 할 때 무섭게 뛴다. 그래서 당분간 사죄의 의미로 ‘보세의 역사’를 파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