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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 낮은 자존감의 이유

등록 2022-07-07 18:04수정 2022-07-08 02:37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삶의 창] 김소민 | 자유기고가

동네에 떠돌이 진돗개가 나타났다. 출몰한 지 한달이 넘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텐데 이제 회색이다. 주황색 목줄을 달았다. 이 개가 산책하던 푸들 몽실이에게 다가왔다. 진돗개는 순했다. 몽실이 엄마가 머리를 만져주자 더 만져달라는 듯 몸을 붙였다. 이렇게 두면 누군가에게 잡혀 팔려가지 않을까, 학대당하지 않을까? 신고하면 주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몽실이 엄마는 진돗개의 목줄에 리드줄을 걸고 신고했다. 구조대원 4명이 왔다. 진돗개는 이들을 순순히 따라갔다. 몽실이 엄마는 구조대원을 붙들고 개가 잘 지내는지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이 개는 보호소에서 길거리보다 더 행복할까? 2주 안에 주인을 찾지 못하면? 2주 안에 입양도 되지 못하면? 진돗개는 안락사당할 거다. 후회가 밀려왔다. 멀어져 가는 꼬질꼬질한 엉덩이를 바라보며 이 중년 여자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개를 키우면 힐링이 될 줄 알았더니 고통만 커졌어.” 몽실이를 향한 사랑은 개 전체를 향한 공감으로 번져 이 사람은 자꾸 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의 고통이 내게 생생하게 느껴지느냐일 거다. 나는 그게 무서워 모른 척한다. 뜬장에 갇혀 음식물 쓰레기를 먹다 목매달려 죽는 개들의 존재를 알지만, 모르고 싶다.

“하늘을 찌르는 기쁨.”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김정영·이혁래)에서, 13살부터 미싱사로 일한 신순애씨는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을 만난 날을 이렇게 표현했다. ‘7번 시다’인 그는 그곳에서 이름으로 불렸다. “나도 공부할 수 있다는 행복” 때문에 밤 10시에 퇴근하면 밤 10시20분에 끝나는 수업을 들으러 뛰었다. 13살에 미싱을 잡은 임미경은 15일 동안 밤샘 연속근무를 하고 “죽을 거 같아” 동료 두명과 남산으로 도망갔다. 잠을 자려고. 돌아오니 사장이 노발대발했다. 그는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다. 노동교실에서 만난 근로기준법은 그에게 희망이었다. 정부가 노동교실을 폐쇄하자 이 소녀들은 1977년 9월9일 노동교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쌍욕을 듣고 따귀를 맞았다. 임미경은 소년원에 갈 나이였지만 성인 구치소로 보내졌다. 당국은 그의 주민등록번호를 조작해 나이를 바꿔버렸다. 임미경은 자신에게 실형을 내린 판사에게 연민을 느꼈다. ‘누가 시켰길래 저럴까.’ 되레 그들은 자꾸 물었다. “누가 시켰나.” 어린 임미경은 “스스로 왔다”고 답했다. 그는 감방 위 쪽창으로 눈, 낙엽, 구름을 보았다. 이 소녀들은 자기 이름을 불러준 노동교실을 용감하게 사랑했다. 환갑이 넘은 지금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고맙다, 열심히 살았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의 친구는 목공 일을 하다 손가락 두개를 잘렸다. 봉합수술을 했다. 간병인은 3분마다 바늘로 그 환부를 깊이 찌른다. 굳은 피 위로 새 피가 흐른다. 잘려나간 손가락을 잃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 잘려나간 손가락과 남은 손은 고통으로 연결된다. 4·3항쟁을 다룬 이 소설에서 한강 작가는 그 고통을 견디는 무녀 같다. 그를 통해 제주의 원혼들이 돌아온다. 총살당한 젖먹이가 있고 평생 오빠를 찾아 헤맸으나 주검조차 수습하지 못한 노인도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다고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그 고통에 공감하는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사랑에 필수적인 공감, 그에 따르는 행동이 무섭고 귀찮아 고개를 외로 튼 수많은 나를, 나는 기억한다. 자존감을 가지려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사랑하지 않은 비겁함은 수치스럽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했다. 실은 사랑하지 못해서,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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