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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별일 없이 무탈한, 누군가와 함께여서 행복한

등록 2022-06-19 18:09수정 2022-06-20 02:05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오늘도 별다른 큰일 없이 무탈하게 하루가 갔다. 5년짜리 일기책을 한권 샀다. 2022~2026년 같은 날짜의 칸이 다섯개라 5년 동안 계속 일기를 쓸 수 있겠다. 가끔 방송 중에 앞으로의 계획, 올해 하반기 계획을 묻는 이에게 “저는 계획 없이 살아요. 그저 코앞에 떨어지는 일 하나씩 하나씩 해내는 맛으로 살지요, 뭐”라고 답한다. 그 말은 사실이다. 무슨 거한 계획보다 그냥 오늘 하루를 잘 넘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오랜만에 만난 이에게 “한동안 못 봤네, 안 보이데” 했더니 하와이 다녀왔단다. 갑자기 영화 <친구>의 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가 생각나 웃었다. 언젠가 나도 갈 수 있는 곳이라 자세히 물어봤다. ‘무스비라고 스팸달걀주먹밥 잡숴봤어요?’ 하니 “그까이 거 우리 집서 내가 만든 게 더 맛있어. 뭐 하려고 그 비싼 걸 사서 먹어?”라고 답한다. 그럼 아침은 어떻게 해결하셨나? 호텔 조식뷔페? “아니 저녁때 슈퍼에서 장 봐서 저녁 먹고, 남은 건 냉장고에 뒀다가 그걸로 아침 해결하고 점심 한끼만 사먹었어요. 물가가 장난 아니더라고.” 그럼 교통은? 렌터카? “아니요, 버스 타고 다녔어요. 호텔 앞에 온갖 버스가 다 서요. 해변 한바퀴 도는 코스, 아울렛 가는 코스, 걸어서 나오면 그냥 해변이라서 스노클링만 재밌게 했어요.” 딸과 둘이 한 여행, 주변의 엄마들이 다 부러워했다. “얼마나 좋아? 딸하고 하는 여행. 그 댁 따님이 아마 비행기 승무원일걸? 어련히 잘 알겠어?”

또 다른 이웃은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걷다가 횡성 들러 소고기 먹고 왔다면서 “세상에, 세상에 너무 좋더라. 러시아를 왜 가? 자작나무숲 최고더라고. 아름다웠어.”

다들 이렇게 나들이 다녀온 이야기꽃을 피운다. 별일 없이 무탈한 게 지루했던 나날이 내게도 있었다. 별일 좀 있어봤으면… 심심해 죽겠다 하니, 친구 어머님이 따끔한 야단을 치셨다. “그날이 그날인 게 더없이 좋은 거야. 별일 있는 게 무에 좋겠냐?” 세월 지나 곱씹어보니 옳은 말씀이다.

우리 집에 요사이 별일이 있다면 시누이댁 강아지 초코를 임시보호하는 것이다. 노견인 우리 집 미미는 16살, 초코는 3살. 둘 다 암놈이라 피차 뜨악하다. 일주일 지나 좀 나아졌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바라던 바가 아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개들 사이에 설득력이 없겠지만…. 흰 곰인형 같은 초코는 두 손바닥에 몸이 다 담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웃으며 봐준다. 저녁녘 산책에 미미랑 풀방구리 같은 초코를 데리고 나왔는데, 쥐똥나무 꽃향기로 황홀한 바람이 불었다. 열매가 쥐똥 같다고 이름을 그리 지었겠지만 꽃향기만은 라일락 못잖게 정말 달콤하다.

휴일 목욕은 빠질 수 없는 나의 힐링 코스. 목욕탕 언니에게 쉬는 날은 뭐 하냐고 물었다. “이틀 쉬는데 그렇게 쉬고 몰아서 일하는 게 좋아요. 하루는 청소·빨래 등 집안일하고, 또 하루는 장 봐서 반찬 만들고 김치도 담그면서 그냥 집콕 해요. 옆의 언니는 바깥 외출을 좋아하는데 저는 깨끗이 집 치워놓고 텔레비전 보는 게 최고예요.” “사람 상대를 많이 하니까 우리 입장과 같네”라고 답했다.

지난주엔 중학교 2학년 5반 친구들과 서촌에서 점심을 했는데, 살림의 고수들이라 웬만한 외식은 놀랄 게 없는데 그날은 처음 맛보는 색다른 메뉴가 좋았단다. 먹으면서 분석도 했다. 생강이 들어갔네. 요 작은 알갱이는 무얼까? 겨자씨야. 그래? 넷이서 좁쌀보다 조금 큰 겨자씨를 오물오물 씹어본다. 집에서 기르는 수국과 수레국화꽃이 예쁘게 피었다는 얘기, 꽃구경하는 재미 등등. 4차 백신 맞고 왔다는 친구도 있고, 다들 귀가해서는 아이들이 와서 밥 차려주고 치운다, 애썼다, 서로에게 “과죽모”(과로하다 죽어도 엄마)라며 웃었다.

여행 갈증이 텔레비전 시청으로도 안 가셔서 엠비시(MBC) 라디오 ‘여행의 맛’ 진행자이자 <백년식당>, <식당 골라주는 남자>, <노포의 장사법>, <할매, 밥 됩니까> 등의 저자 노중훈 작가와 만났다. 그동안 여행한 사진 기록과 주인장 이야기, 노포의 역사, 독특한 상차림 등등 맛깔스러운 솥밥집에서 소위 디너쇼를 겸했다. 저녁을 곁들인 토크쇼였는데, 객석엔 다섯명이 앉아서 재미를 봤다. 식당주인 본가 모친이 밀양 분이신데 김치가 백미였다. 점점 더 노래나 음식이나 기본을 보게 된다. 기술을 부리는 이의 노련함도 감탄스럽지만 역시 뼈대를 본다. 쌀밥의 향, 김치, 된장국의 맛, 더하고 더하는 맛보다 본재료의 맛을 살리는 기본, 모처럼 여행과 음식 이야기에 웃음 가득했고 남이 차려준 맛난 밥상이 너무 행복했다. 이런 자리에 남편이 함께라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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