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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탁환 칼럼] 젖은 마음의 시간

등록 2022-06-14 18:09수정 2022-06-17 13:55

유치원생들의 세번째 반응은 어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거침없이 논으로 들어가선 모를 몇줄 심다가 슬그머니 주저앉는다. 바지와 윗옷과 모자까지 젖은 뒤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논으로 몸을 던진다. 엄마의 충고도 교사의 주의사항도 잊고 흙탕물 헤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지난달 17일 오전 서울의 한 논체험장에서 어린이들이 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7일 오전 서울의 한 논체험장에서 어린이들이 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탁환 | 소설가

손 모내기 체험을 위해 아침 일찍 유치원생들이 도착했다. 처음 온 5세반은 잔뜩 긴장하고 6세반은 재회를 반기고 7세반은 의젓하다. 모를 쥐기 전, 폐교 강의실에서 벼의 한해살이를 30분 남짓 공부했다. 파종부터 탈곡까지 자료사진을 보는 얼굴들이 진지하다.

논 앞에 선 어린이들의 반응은 셋으로 나뉜다. 대부분은 나와 같은 보조교사 손에 이끌려 조심조심 다리를 넣는다. 소리 내지 않고, 두 발에 닿는 물과 흙을 가만히 느낀다. 다음으로, 뒷걸음질 치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이가 한둘씩 꼭 있다. 논에 들어가기 싫다는 것이다. 등을 다독이고 달래면서 이유를 물으면 같은 답이 돌아온다.

“엄마가 더러운 물에 절대로 들어가지 말랬어요.”

모내기를 앞둔 농부는 하루에도 몇번씩 물꼬를 살핀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속언처럼, 아무리 농부가 부지런하고 기술이 발달해도, 오래 비가 쏟아지거나 큰 바람이 불면 그해 농사는 망친다. 다섯달이 넘도록 가뭄이 이어지니 물싸움까지 일어날 판이다. 초봄부터는 저물 무렵엔 텃밭에 머문다. 밤들 때까지 물을 뿌려야 채소들이 시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농부과학자 이동현 박사를 도와서, 내가 3년째 손 모내기를 하는 논은 바로 옆 섬진강에서 끌어온 물을 쓴다. 가을과 겨울 내내 조용하던 농수로로 한꺼번에 물이 들 때는 들녘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듣는 기분이다. 강에 머물던 백로들이 물 든 논으로 건너와선 아침 식사에 바쁘다. 멧비둘기와 까치와 까마귀까지 주변을 맴돈다. 논으로 옮겨 먹이 활동을 했다고 아프거나 급사한 새는 아직 없다.

내 논에 섬진강 물을 들이려면 논두렁을 함께 쓰는 이웃과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웃 논 물꼬를 막고 내 논 물꼬를 터야, 원하는 때에 원하는 양을 확보할 수 있다. 내 논에 물을 먼저 채웠다면, 이웃 논의 형편을 찬찬히 살펴 내 물꼬를 닫고 이웃의 물꼬를 열어주어야 한다.

벼를 친환경으로 키우기 위해서도 이웃과의 의논이 중요하다. 내 논에 제초제를 치지 않고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더라도, 이웃 논에서 제초제를 고집하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친환경으로 나란히 농사를 짓는 것은 손익을 함께하는 생활의 문제이자 논 습지와 식량주권을 고민하는 철학의 문제이다. 유치원생들이 실습할 논을 포함한 들녘에선 다행히 농부들이 전부 제초제 없이 농사를 지어오고 있다.

제초제를 치지 않은 논에선 다양한 생물이 함께 산다. 모내기 전부터 개구리들이 둠벙과 논을 바쁘게 오가며 운다. 모내기를 마치면 수만마리의 풍년새우가 초록빛을 뽐내고, 긴꼬리투구새우도 모습을 드러내며, 미꾸라지와 함께 독 없는 물뱀까지 종종 지나간다. 가을로 접어들면 수백마리 메뚜기가 논두렁을 걷는 이들을 반긴다. 젖은 땅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도시에선 젖은 땅을 밟기도 어렵다. 시민의 이동과 물류의 운송에 편리하도록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이나 시멘트가 깔렸다. 나무가 자라는 곳과 물이 흐르는 곳은 법과 제도에 따라 관리한다. 도시 안에 습지를 만들더라도, 젖은 땅으로 들어가서 축축한 흙을 밟고 만지고 냄새 맡지는 않으며, 충분한 거리를 둔 채 지켜보는 정도다.

섬진강을 산책하면 거의 매일 죽은 몸뚱이와 맞닥뜨린다. 벌과 나비에서부터 개구리와 뱀, 삵과 수달과 고라니까지, 강과 함께 살아온 생물들이다. 강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뿐만 아니라 죽어 썩어가는 생물까지 품는다. 마른 땅은 깨끗하고 젖은 땅은 불결하다는 식의 구별과 평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사람을 중심으로 정돈하지 않은, 예측불가능한 상황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야생 숲이나 강에 비해 이 들녘은 수천년이나 농부들이 일군 땅인데도 그렇다.

유치원생들의 세번째 반응은 어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무조건 사진으로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력하고 짜릿하다. 여기에 속한 어린이들은 거침없이 논으로 들어가선 모를 몇줄 심다가 슬그머니 주저앉는다. 바지와 윗옷과 모자까지 젖은 뒤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논으로 몸을 던진다. 엄마의 충고도 교사의 주의사항도 잊고 흙탕물 헤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못줄을 따라 선 교사와 어린이들의 두 눈이 동시에 커졌다가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간다. 관리한 적 없는 웃음이다.

박노해는 시 ‘사라진 야생의 슬픔’을 통해 “이 땅에서 사라진 야생 동물들과 함께/ 야생의 정신도 큰 울음도 사라져버렸음을” 알아야 한다고 적었다. 익숙한 물꼬를 막고 새 물꼬를 터, 마른 땅을 젖은 땅으로, 만인만 위하는 마른 마음을 만물을 챙기고 키우는 젖은 마음으로 바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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