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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o”와 “a” 사이 “e”

등록 2022-06-09 18:16수정 2022-06-10 02:07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통신원 칼럼] 김순배 |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얼마 전 수업이 끝난 뒤 ‘여학생’ 한명이 다가왔다. “사회적 이름”을 쓸 수 있겠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했는데, 여성이나 남성으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갖지 않아서 중성적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요청이었다. ‘지혜’가 아니라 ‘정민’처럼, 명확한 남녀 구분이 안 되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2019년에 설치된 학교 성다양성부 안내대로, 그 학생의 이름을 본인이 요청한 대로 바꿔서 부르고 있다. 비슷한 시기, 학교의 다른 건물에 갔다가 화장실 입구의 표지판 앞에서 멈칫했다. 알고 보니 3년 전부터 운영되는 성중립 화장실이었다. 내가 세상 돌아가는 데 한참 둔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설문조사에서 성별을 묻는 칸에 ‘기타’ 항목을 넣은 것을 보고 아차 싶었다. 고등학생 딸에게 물으니, 학교에서 성교육을 하면서 남녀 성관계뿐 아니라 동성 간의 성관계도 가르친다고 전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칠레는 보수 세바스티안 피녜라 전임 대통령이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하는 법안에 지난해 12월 서명해서 제도화된 나라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7개 나라에서 동성 간 결혼이 합법적으로 보장된다.

이런 성 다양성의 문제와 함께 성평등의 문제는 일상에서 더 자주 느낀다. 최근에는 이름 뒤에 쓰는 성씨의 순서를 법적으로 바꿨으니, 학적도 수정해달라는 학생의 요청이 있었다. 기존에는 이름+아빠 성+엄마 성 순이었는데, 엄마 성을 아빠 성 앞에 두겠다는 것이다. 올해부터 시행된 법에 따라서 보장된 권리다.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나 아빠 가운데 어느 쪽 성씨를 먼저 둘지 정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스페인어에서 성 다양성과 성평등을 실현하는 문제가 더 자주 논란이 된다. 스페인어의 명사는 모두 남녀 성별이 있어서, 각 단어 앞에 남녀 관사를 붙이고 성에 따라 남성은 ‘o’, 여성은 ‘a’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여자아이는 “la niña”(라 니냐), 남자아이는 “el niño”(엘 니뇨)라고 하는 식이다. 그런데 아이들이라는 복수 표기는 “los niños”(로스 니뇨스)라고 하는데, 이처럼 명사의 복수 표현에서 남성을 나타내는 ‘o’를 쓰는 게 논란이 되고 있다. 복수 표기에서 생기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a’나 ‘o’ 대신 ‘@’나 ‘x’를 활용해서 “niñ@s” 또는 “niñxs” 식의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읽기 불편한 문제가 따르지만 스페인어권 동료들의 이메일에는 이런 방식의 표기가 많아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칠레 유년기 차관이 ‘a’나 ‘o’ 대신 중성적 모음 ‘e’를 써서, 아이들을 지칭할 때 “les niñes”(레스 니녜스)라는 성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적인 표현도 함께 쓰는 게 옳다고 공식 에스엔에스(SNS)에 올려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스페인어 규정을 총괄하는 스페인 왕립학술원(RAE)에 누군가 질의를 했는데, ‘“niños”라는 표현이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어린이를 지칭하니, ‘e’ 사용은 어형론에 맞지도 않고 불필요하다’는 답변을 내놨다. 교육부 장관까지 나서 스페인어 문법에 없는 이 표현을 지지했지만 문법까지 바꾸는 표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단어의 모든 ‘o’와 ‘a’를 ‘e’로 바꿔가며 반발하는 짤도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한국어에서 여배우, 여교수 등의 표현에서 ‘여’ 자를 빼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인데, 고민하고 논쟁하며 사회적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면서 성 다양성과 평등의 문제는 점점 더 일상에서 자연스레 수용되며 공존의 길을 가고 있다. 언어가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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