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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22년의 우리는 ‘푸릉’을 원할까?

등록 2022-06-08 18:23수정 2022-06-09 02:40

<우리들의 블루스>. 티브이엔 제공
<우리들의 블루스>. 티브이엔 제공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주말마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챙겨 봤다. 노희경의 드라마를 꾸준히 좇다 보니 작가가 그려낸 시대의 성장통을 함께 앓는 기분이다. 봉제공장에서의 <바보 같은 사랑>처럼 눈길 닿지 않는 가난을 품든,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잘난 방송국 사람들의 잘난 것 없는 상처를 후비든, 노희경은 주변을 품고 중심을 낯설게 비틀면서 시청자를 자극했다. 시청률이 저조해 ‘마니아층’ 작가란 꼬리표를 달기도 했으나, 이제 그는 스타 배우들이 알아서 찾는 작가가 됐고, 그가 던진 묵직한 주제들은 화제가 되고 논쟁을 낳았다. 정신질환(<괜찮아, 사랑이야>), 성폭력 트라우마(<라이브>), 초라한 노년(<디어 마이 프렌즈>) 등 대중적이지 않은 주제들이 대중성 있는 배우들과 만나면서 공론장을 넓혔다.

계몽의 언어가 부담스러운 시청자들은 바로 이런 이유로 노희경의 작품을 싫어하지만, 사회비평과 맞닿은 연구를 해온 나는 그가 고민과 타협을 거쳐 확보한 대중성이 일견 부럽다. 학문 세계에서의 사회비판이란, 비판의 은어와 문법을 공유한 부족 안에서의 한풀이 친목모임으로 끝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부족 바깥의 사람들을 불온한 타자로 멀리하거나 숭고한 생명으로 추앙할 뿐, 동등한 대화자로 초대할 의지는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가 없어도 월급, 발표비, 심사비가 꼬박꼬박 들어온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그야말로 노희경표 비판, 성찰, 치유, 화해의 종합판이다.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옴니버스 구도 아래 작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들이 가족, 친척, 친구는 물론, 바다, 배, 시장, 술, 라면, 돌고래, 전복, 소라 등과 얽히면서 ‘푸릉’이란 마을에 생기와 온기를 입혔다. 장애, 이주, 청소년 임신, 우울증, 가난 같은 주제들이 푸릉이라는 관계의 다발을 거치면서 함께 고민하고 소통해야 할 ‘우리’의 현안으로 재등장했다. 특히 발달장애인 정은혜 화가가 해녀 영옥의 쌍둥이 언니 영희로 직접 출연한 에피소드는 울림이 컸다. 재능 있는 장애인만 주목받는 우려는 있지만, 영희의 외로움과 영옥의 고단함을 동시에 비춘 작가의 시선도, 선주민들이 미심쩍은 이주자 영옥과 그의 언니를 환대하기까지의 연출도,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탈시설 운동의 대중적 길잡이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대한 여러 비평이나 공동체를 둘러싼 최근의 움직임을 보면 다소 불편한 질문이 떠오른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푸릉을 원할까? 임신중절을 하러 병원을 찾은 영주한테 의사가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려주는 장면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급진화한 여성운동과 엇박자를 탔다. 20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가부장제에 맞서 출산, 결혼, 연애, 섹스까지 거부하는 마당에 상처도, 정도 많은 푸릉의 남정네들을 보듬는 작가의 시선은 “순정남들에 대한 시대착오적 연민”(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으로 비친다. 오늘날 온·오프라인에서 배설되는 차별과 혐오 표현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의 선택은 정치인의 쉰내 나는 화합도, 활동가의 철 지난 연대도 아닌 말 그대로 거부가 된 것 같다. 주변에서 만난 학생들이 기대하는 ‘안전한 공간’이란 남녀노소가 질펀하게 뒤엉키는 푸릉 같은 마을이 아니라, 위협이 될 만한 요인들을 애초에 걷어낸 무균지대에 가깝다.

한국만 유별난 건 아니다. 근래 인류학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거부(refusal)의 정치’를 목격 중이다. 반복되는 억압, 통제, 폭력, 낙인에 지친 원주민, 홈리스, 여성 등이 연결 대신 단절을 선택하고, 거부 행위를 함께 실천하는 ‘우리’ 안에서 소속감을 느낀다. 노희경 작가가 이런 흐름에 무지했다고 보긴 어렵다.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 집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는 정준의 대사는 단절, 단언, 단속을 서두르는 대신 서로가 새롭게 배워나갈 기회를 터줄 필요성을 제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취약한 삶들의 반목이 소수자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만큼이나 일상적인 풍경이 될수록 이런 기회는 중요하다.

인류학자 캐럴 맥그래너핸은 거부가 단순한 ‘노’(No)가 아니라 저항이자 비판이며, 변화에 대한 열망의 표현임을 역설했다. 언젠가 노희경이 그 세심한 언어로 거부의 정치를 행사하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대중성 있게 담아줘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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