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혁신] 김진화 | 연쇄창업가
둘째는 휴일에도 일찍 집을 나섰다. 중간고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보며 일본어를 ‘야매’로 익혔던 녀석은 외고에 진학해 제대로 일어를 학습하고 있다. 가뜩이나 내신 경쟁이 치열한데 우리 때와 달리 수행평가 등 챙겨야 할 것도 많아 안쓰럽기 짝이 없다. 가끔 수행평가 관련 이것저것 묻기는 하는데, 대신 해달라는 식의 요구는 일절 없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수행평가를 부모가 해주거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드라마 속 얘기만은 아니라는데도 말이다. 정직하게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불공정 게임은 이미 아이의 인생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물론 아이의 자율성을 망치는 짓거리에 동참할 생각은 없다.
애처로운 맘으로 딸의 책상을 살피다 반가운 책 한권을 발견했다. 매트 블랙의 세련된 하드커버가 생경했지만 분명 <종의 기원>이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입론이 지성사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정도 흥미진진하다.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해군 탐사선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를 탐험하지 않았다면, 일반적인 학자들처럼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그런 ‘발견’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비글호 탐사 이후에도 다윈은 7만평 농장이 딸린 집에서 40년을 가족과 함께 지내며 <종의 기원>을 비롯한 역작들을 만들어냈다. 이런 잉여로운 삶이 가능했던 건 부모,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외조부 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사업가로 유명한 조사이아 웨지우드. 맞다, 우리가 아는 그 웨지우드 브랜드의 창업자가 외조부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 역시 부모 찬스에 힘입어 돈 걱정 없이 과학적 발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고, 이를 조세징수 대행업 지분에 투자해 더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자신의 작업은 물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연구자 펀드를 만들어 후원할 정도로 넉넉했다. 훗날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일원으로 지목돼 단두대에 서기 전까지는 참으로 부러울 게 없는 인생이었다. 부모덕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비단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 루이스 캐럴 등 문필가에서 토머스 홉스 등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장관 후보자 자녀들의 ‘부모 찬스’ 의혹으로 또다시 시끄럽다. 조국 전 장관 사례처럼 서류 위조 등 명백한 위법 행위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세대 부모들의 위태로운 자식 사랑이 여야 내지는 직군을 가리지 않고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런데도 남의 부모 찬스는 꾸짖고, 우리 편 부모 찬스는 괜찮다거나, 우리도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보라는 식의 대응만 난무한다. 이쯤 되면 삿대질이 아니라 근본적 대책이 필요한 게 아닐까? 정히 막을 수 없다면 인류 내지는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부모 찬스가 작동하게끔 만들 수는 없을까?
고작 의대에 밀어넣거나 ‘신의 직장’에 내리꽂기 위해 평범한 환경에서 자라 온 경쟁자들 뒤통수치는 대신 인류와 미래 세대를 위해 제대로 부모 찬스를 쓰게 하면 어떨까. 필요하다면 상속세를 손봐서라도 양성화하면 어떨까. 인문학이나 기초과학 비인기 분야, 생계유지가 막막한 예술 분야에서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금수저’ 젊은이들에게 증여, 상속세 공제 혜택을 준다면 뭔가 바뀌지 않을까? 그냥 지금처럼 겉으로는 공정하고 평등한 척 모두가 부조리극에 가담하는 꼴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어린이날 오후, 아이들 보기가 부끄러워 이런 생각마저 떠올릴 만큼, 우린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