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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어지는 것과 선택한 것의 차이

등록 2022-05-05 18:07수정 2022-05-06 02:38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99센트>, 1999년(2009년 디지털 재작업).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99센트>, 1999년(2009년 디지털 재작업).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크리틱]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먼저 골라놓고 열어주세요.” 편의점에서 빙과가 들어 있는 냉장고를 열고 그 안을 한참 뒤적뒤적 고르면 주의를 받게 된다. 하지만 요것조것 구경하는 재미는 빙과 맛의 8할을 차지한다. 물건들에는 사람을 유혹하는 광채가 있다. 그 광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독일 출신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67)의 <99센트>다.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에서 8월14일까지 이 작품을 볼 수 있다.

<99센트>는 선반이 겹겹이 가로줄을 만들면서 그 위로 끝도 없이 진열된 알록달록 색색의 상품들을 보여주는 소비사회의 이미지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형 소매점을 높은 위치에서 원거리 촬영했다. 기울어짐 없이 정확히 수평을 이루는 선반들로 인해 이미지는 어느 한 방향으로 초점을 둘 곳 없이 전면적으로 평평해 보이고, 그로 인해 가로세로로 무한히 펼쳐진다는 인상이 증폭된다. 게다가 작품의 거대한 크기로 인해 실제로 작품 앞에 서면 한눈에 물건들을 장악하기 어렵다.

‘장악’이라는 표현은 쉽게 파악된다는 것이고, 내가 상황이나 분위기의 주도권을 쥔다는 뜻으로 쓰인다. 무언가를 장악하지 못한 채 그 안에 있으면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거나, 아니면 아예 무책임해진다. 가령 구성원들의 성격을 전혀 알 수 없는 모임이라든가, 어떤 내용이 나오고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는 회의가 오후에 잡혀 있다면 아침에 눈뜰 때부터 왠지 마음이 편치 않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 모임이나 회의의 주도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미 결정되어 제공된 사항들 내에서 무엇을 선택하든 본인의 삶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부담도 없고 무책임하게 임해도 되지 않겠는가.

계산대에서 돈만 지불하면 마음에 드는 것을 얼마든지 사서 누릴 수 있는 소비자들의 세상이다. 그러나 구르스키가 찍은 <99센트>에서 보여주려는 소비사회의 면모는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무기력감을 자아내는 요소가 잠복돼 있다. 사탕들은 종류가 수백가지여서 눈요기하는 재미는 있겠지만, 무엇을 집어도 선택의 결과는 언제나 99센트이다. 형형색색으로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상품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아무거나 골라도 됩니다. 안심하세요. 당신, 당신의 지갑, 그리고 당신의 인생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투자 분야의 현자로 알려진 나심 탈레브는 최근 저서 <스킨 인 더 게임>에서, 자기 선택의 결과가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뭔가 이상한 사회라고 짚어준다. 이를테면 돈을 엄청 벌었는데도 그 돈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커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예전과 비교해서 차이가 없다면, 크게 잘못된 것임을 자각하라고 한다. 왜냐면 부는 우리에게 더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라면 지금 자기 삶의 위상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모험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어야 하며, 그래서 선택의 행위에는 반드시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돈과 부에 관련된 탈레브의 생각을 모든 분야의 인생살이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한다. 하지만 솔직히 행복한 삶에 도달하려면 돈이 든다. 통장 잔고가 행복의 수치를 대변해주지는 않겠지만, 아니라고 전면 부정할 수도 없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이런 대사가 나오지 않던가. “당신 톡이 들어오면 통장에 돈 꽂힌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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