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요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다. 빠르고 자극적인 전개가 가득한 시대에 역행하는 듯 느린 전개의 이 드라마는 2화에 등장한 “날 추앙해요”라는 염미정의 대사 때문에 확 이목을 끌었다. 추앙이라니, 일상에서 사용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등장인물인 구씨조차 생소한 그 단어를 검색해본다. 추앙.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 사전의 예문처럼 ‘이순신 장군을 영웅으로 추앙한다’ 할 때나 어울리는 단어 아닌가.
매일 소주를 퍼마시는 알코올의존자인 구씨에게 염미정은 말한다. 한번은 채워지고 싶다고. 사랑으로는 안 된다고. 그러니 자기를 추앙하라고. 시청자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추앙이란 개념은 이제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흔하게 봐오던 연애 말고, 추앙하는 관계. 염미정의 말을 빌리자면 ‘잘돼서 날아갈 거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주고, 바닥을 기어도 쪽팔려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그런 전적인 응원’을 하는 것이다.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이런 이상적인 응원이 현실에서도, 가족이라는 형태 안에서도 가능할까.
흔히들 성숙한 관계를 논할 때 다 큰 성인이자 독립된 인격체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드라마에서 미정의 가족은 날마다 소주를 사러 가는 구씨에게 대단하다며 혀를 차는데, 이는 그가 남이기에, 가족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알코올의존자인 구씨가 염씨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면, 그렇게 방황하고 헤매는 것까지도 다 필요한 시간이라고, 그렇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불가능해 보인다.
무엇이든 옳다고 하는 조건 없는 지지와 응원은 심리상담 시간에나 받을 수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어떻게 하라, 하지 말라 같은 스트레스 받을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냉정하게 말하면 시간과 돈으로 치환되는 서비스다. 가까운 가족 관계에서는 더 부딪치고 더 싫은 잔소리를 하게 된다. 잔소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게 꾸짖거나 참견함, 또는 그런 말’이다. 아무리 애정에서 하는 말이라도 듣는 쪽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잔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면 타인의 필요 정도를 알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 속 두 인물 모두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것에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상대방이 선의로 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정말 뭐든지 옳다고 알아서 잘해 나갈 거라고 두는 것이 성숙한 지지인가. 가령 건강을 해칠 정도로 술을 마시거나, 도박하거나, 전망이 나쁜 투자를 하거나, 사업을 하려고 해도 참견하지 않는 것이 맞을까.
올바르게 훈육해야 하는 부모가 되거나 지도해야 하는 강사가 된다면 올바른 응원과 잔소리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입시학원에서 가르치던 때를 돌이켜 보면 내 수업에 잔소리의 비중이 컸던 것 같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한 애정을 쏟은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강사로서 비효율적인 노동을 한 것이기도 하다. 성인을 대상으로 영화 워크숍을 할 때도 수강생이 몇백만원 사비를 들여서 만든다는 것을 알기에 필요 이상으로 잔소리했던 것 같다. 뼈아프게 시행착오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나도 누가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바랐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하고 나면 늘 후회하게 된다. 속이 헛헛해지고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나나 잘하자, 하고 반성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실천하려면 어렵지만 추앙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귀한 마음이라는 건 분명하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현실에서도 올바른 응원을, 추앙이라는 걸 조금은 실천해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