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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즈넉한 죽음

등록 2022-04-28 15:58수정 2022-04-28 16:16

[삶의 창] 홍인혜|시인

한 그루의 나무와 살았다. 몇해 전에 들여온 녹보수 화분이었다. 어른 가슴께 정도 오는 키에 반들거리는 잎사귀가 빼곡한 멋진 식물이었다. 나는 원예에 전혀 재능이 없지만 나의 유일한 반려나무를 애지중지 가꿨다. 동거하기 시작한 첫해에는 화분흙에 묻어온 흰개미를 소탕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 약 저 약 바꿔 쳐가며 바글대던 개미 군단을 겨우 몰아냈다. 이듬해에는 깍지벌레와 장기전을 벌였다. 잎사귀 뒷면과 줄기에 불법 거주하던 벌레들을 테이프로 하나하나 떼어내며 나무를 간호했다.

매서운 겨울 날씨도 나무에겐 시련이었다. 적어진 일조량, 건조한 기후, 무거워진 실내공기 삼박자 때문에 녹보수는 겨울 끝물엔 항상 기력을 잃곤 했다. 나무가 초록색 불꽃이라면 2월 즈음엔 언제나 사위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봄이었다. 볕이 촘촘해지고 공기가 유순해지는 계절이 오면 나무는 기적같이 다시 살아나곤 했다. 가지 끝마다 물기가 돌고 잎사귀는 다시 풍성하고 매끈해졌다. 나는 짙푸른 어른 잎사귀들 틈에 빼꼼 돋아난 여린 연두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겨울이 갔음을 느끼곤 했다.

이 모든 문장이 과거형임에서 불길함을 느꼈다면, 애석하게도 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몇년간 어찌어찌 겨울을 나던 나의 나무가 이번 겨울은 건너오지 못했다. 2월 말 즈음 눈에 띄게 잎이 줄어들고, 축 처진 모습을 보이기에 으레 그랬듯 물을 담뿍 줬다. ‘봄까지 조금만 힘내!’ 하고 응원하며. 그런데 물을 먹은 녹보수는 다음날 남은 잎사귀의 절반을 한꺼번에 떨궈버렸다. 놀란 나는 혹시 물이 부족했나 싶어 한번 더 물을 주고 식물영양제까지 심어두었는데-알고 보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3월이 되자 녹보수는 마지막 남은 잎사귀 하나마저 전부 놓아버렸다.

결국 우리 집엔 이파리 하나 없는 마른나무 한 그루만 남았다. 한때 금화처럼 반들거렸던 잎사귀들이 부도수표처럼 칙칙한 빛깔로 흙바닥에 쌓였다. 그것들을 치우며 생각했다. 이 지경이 된 나무가 살아날 수 있을까? 그래도 봄이라는 마법의 시즌이 오면 되살아나지 않을까? 4월이 되자 고대했던 봄이 왔다. 날이 갈수록 대기가 온화해지고 집을 기웃거리는 햇빛의 키가 커졌다. 나는 봄볕이 매만져준 나의 나무에서 기적처럼 새순이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녹보수는 잎을 전부 잃은 앙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누가 봐도 진작 죽은 나무였다. 하지만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다. 나무는 언제 죽었다고 판단하는 걸까? 포유류는 심장이 멈추고 숨이 끊어지면 사망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식물은 어떨까. 잎사귀가 다 떨어졌다고, 가지가 말랐다고 이 친구가 ‘죽었다’고 판단해도 되는 걸까? 만약 저 딱딱한 가지 안에 한 방울의 생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가지를 칼로 베어보라는 조언이 있었다. 안쪽에 조금이라도 물기가 느껴지면 가망이 있고, 속속들이 말라 있으면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나는 칼을 들고 녹보수의 몸체를 조심스레 파보았다. 미안하다 되뇌며 저 깊은 곳까지 파들어가도 나무는 바짝 말라 있기만 했다.

결국 나는 인정했다. 나의 나무는 세상을 떠났다. 식물의 죽음은 조용했다. 그는 조용히 번성하고 조용히 앓다가 조용히 사위었다. 온몸에 진딧물이 끓어도 조용히 견디고, 게으른 반려인이 물을 게을리 줘도 조용히 참고, 볕의 결이 달라지면 조용히 기뻐했다. 여름이 오면 조용히 무성해졌고, 겨울이 오면 조용히 견뎠다. 그런 나의 첫 나무가 떠나버렸다. 역시나 한없이 조용하게. 솔직히 나는 이 나무를 인테리어 목적으로 들였다. 하지만 나무는 나무였다. 목재가 아니고 소품이 아니었다. 내가 신경을 덜 쓰면 기력을 잃고 내가 챙기면 기세가 살아나던 생명이었다. 그가 조용히 떠난 빈집에서 나는 조용히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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