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월가 점령 운동을 이끌었던 주체들이 지도부를 내세우거나 강령을 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든가, 2016~17년 촛불시위에 모인 대중들이 이 시위의 힘을 정치조직화하는 것에 적극 반대했다든가 하는 것은 포스트모던적 사유가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질 때 흔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20대 대선이 ‘수구보수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선거 기간에도, 박빙으로 선거가 끝난 지금도 여전히 의문인 것은 자유주의보수세력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수구보수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는지다. 촛불혁명의 요구를 뚜벅뚜벅 실행해 나가기는커녕 눈치 보고 자만하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치고 무사안일과 내로남불에 정신 못 차리다가 결국 심판대에 서게 된 자유주의보수세력에게 매운맛을 보여주는 것은 이해되지만, 기후위기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넘어서는 대전환이라는 시대정신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국형 수구보수세력들에게 권력을 맡겨도 상관없다는 발상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의 세계인식이 너무 나이브한 탓인지는 모르나, 나는 한국 사회의 여론 지형과 이를 둘러싼 지적 환경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가치가 지배하던 20세기가 저물고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며 그로부터 새로운 공동의 가치를 일궈내야 하는 것이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가치의 다양성 혹은 가치의 상대성이라는 탈근대적 지향성은 종종 몰가치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허용과 옹호를 낳기도 한다. 근래에 내 페이스북 글에 비아냥대곤 하던 어떤 젊은 여성이 나에게 “어쩔티비?”라는 댓글을 달아 쓴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겠다는데 네가 어쩔래?” 하는 뜻을 가진 유행어라고 한다. 내가 무조건 옳다는 우격다짐인데 이른바 포스트트루스(탈진실) 시대의 한 단면이다. 한 사회가 가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다양한 가치들이 산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 가치들 사이의 관계와 위치에 대한 대등하고 진지한 토론과 상호참조를 통해 더 나은 공통의 가치에 대한 민주적 합의에 도달하려는 노력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무시되면 각각의 상대적 가치는 고립된 절대적 가치로 고정되고, 그다음에는 그 절대성 사이의 어떤 교섭도 없는 적나라한 적대 상태만이 남을 뿐이다. 나는 이번 대선 과정과 결과 앞에서 이 위험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에스엔에스(SNS) 등에서 거칠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일반 대중은 물론 나름대로 지적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인문학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나 실용의 세계를 다루는 게 아니라 가치를 다루는 학문이기에, 이러한 가치의식의 혼란은 인문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싹터온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에서부터 이러한 혼란은 예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에 기초한 인류사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근대의 신앙은 제국주의의 세계 침탈이나 두차례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었으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서겠다던 사회주의적 기획 역시 결국 전체주의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한 68혁명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모든 유토피아적 기획들에 내재한 권위주의와 교조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가치의 위계화 대신 수평화를, 축조 대신 해제를, 일원성 대신 다원성을, 구심성 대신 원심성을 이 근대성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로써 우리는 비로소 대문자 세계가 아닌 소문자들의 세계,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들의 세계, 서구-백인-남성의 헤게모니의 전제적 지배 아래서 고통받아온 비서구-비백인-비남성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트모던적 사유체계가 지닌 이러한 전복적인 해방성은 근대성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어떻게 근대 이후의 새로운 일상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나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라는 과제는 불가피하게 공통의 중심 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위한 노력과 실천들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의 대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동원이라든가 어느 정도의 위계관계의 수립 등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곧 근대 및 근대 이전의 모든 권위주의적 비전들의 작동 방식과 다를 바 없는 것이기에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2008년 월가 점령 운동을 이끌었던 주체들이 지도부를 내세우거나 강령을 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든가, 2016~17년 촛불시위에 모인 대중들이 이 시위의 힘을 정치조직화하는 것에 적극 반대했다든가 하는 것은 포스트모던적 사유가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질 때 흔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자신의 문제는 중요하고 심각하나, 이 문제가 전체적인 정치적 과제의 하나로 배치되는 것에는 반대하는 정체성 정치라는 현상도 이와 비슷하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와 실천에 내재한 곤경은 198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 운동 방식의 변화와 맞물려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집단적 사회변혁의 기획들을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교묘히 편승해 사람들을 집단과 공동체로부터 분리해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의 이미지, 즉 노동자가 아닌 자기경영 주체, 수동적 소비대중이 아닌 능동적 소비주체라는 허구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고 선동해 결국 기존 자본주의체제의 자발적인 노예들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마도 포스트모던과 신자유주의의 결합이 낳은 세기적인 아이러니한 풍경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는 지향해야 할 공동의 중심 가치는 해체되고, 변혁을 위한 모든 구심적 기획들은 거부되며, 이를 수행해야 할 공동체들은 붕괴하고 오로지 자기 문제만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고독한 개인들의 세계, 어떤 진리나 진실도 내 이해관계와 좁은 입장에 어긋나면 거부되는 세상, 팩트와 지식은 넘쳐나는데 그 팩트와 지식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어떤 사회적 공준도 설 자리를 잃은 지식의 1차산업 시대를 살고 있다. 수많은 지식과 사실의 더미들을 분류하고 가공하고 연마하여 지혜의 보석을 생산해야 할 거의 유일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수 중 겨우 20%만이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자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대학신문> 2022년 4월20일치 뉴스레터)은 지식산업시대라고 일컫는 현시대가 사실은 얼마나 지식이 빈곤한 시대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오늘날의 대학을 주도하고 있는 세대들은 청춘을 민주주의라는 중심 가치를 위해 싸웠다고 자부하는 7080세대들이다. 대학 시절 몰가치적 대학교육에 저항하여 독자적으로 진보적인 아카데미즘을 추구한 바 있던 이들의 자만과 무책임, 체제순응을 넘는 기득권층화가 유난히 뼈아프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