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선거 뒤끝

등록 2022-04-28 15:45수정 2022-04-28 20:43

정영목 ㅣ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났지만 뒤끝이 남아 있다. 그런 걸 드러내는 건 못난 짓이라는 게 통념인 듯하지만, 나는 수많은 문학의 걸작이 뒤끝이 찬란하게 작렬한 결과라고 보기에 뒤끝도 뒤끝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물론 내 뒤끝을 이렇게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뒤끝이 자동소멸하지 않는 것은 그게 현재와 여전히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번 선거에서 그런 예 가운데 하나는 어느 정신과전문의가 한 후보를 “소시오패스”라고 단정한 발언이었다. 활자 매체의 보도가 맞다면, 그런 위험한 단정이야말로 그가 소시오패스의 특성으로 제시한, “자기편이 아니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행동은 아닌지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혐오 발언에 대한 역치가 올라가서 그랬는지 그건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이와 연결되어 나온 말, 두 후보를 비교하면서 둘 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한 후보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는 게 차이라는 부분, 이건 좀 달랐다.

무엇보다도,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그 후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장점이라고 내세운다는 것은 거꾸로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을 얼마든지 단점으로 지적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건 한 개인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수많은 사람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또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남의 어려움에 공감할 수 있다는 단순한 결정론은 좀 무섭다. 이것은 두 사람을 비교하는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후보는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의 어려움에 공감할 수 없다는, 그래서 소시오패스라는 폭력적 논리를 이면에 깔고 있다. 이 또한 가난하고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 태어났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사람의 상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은 그런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을 모욕한다.

“화목”이라는 말도 문제다. 대체로 가족이란 화목하면서 동시에 화목하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장기적으로 생의 깊은 부분이 얽히는 가족에게 화목이라는 것은 환상이며, 이런 환상을 부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목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화목이란 환상을 유지하려고 폭력적 억압을 불사하는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특히 그럴 것이다. 또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남의 어려움에 공감”한다는 수준이, 가난하고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수많은 사람을 잠재적 소시오패스로 보는 정도라면 그런 화목은 바라지 않겠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고난 속에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인류의 역사를 반영한 것이겠지만, 남보다 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흔히 그것을 예외적인 상황으로 보며 겸손을 잃지 않으려 한다. 가령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그렇다는 뜻으로 불우(不遇)라는 말을 쓴다. 영어로는 특권을 많이 누리지 못한다는 뜻의 underprivileged(언더프리빌리지드)라는 말이 이에 대응할 듯하다. 물론 이런 말들 자체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며,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키워드>(김성기·유리 역)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underprivileged라는 말은 특권을 가진 게 정상적 상태라는 인식을 반영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한 단어에 정반대의 해석이 함께 있는 셈인데, 그것은 두 해석을 건너는 다리가 아주 짧아서 자신의 편한 처지를 운이라고 겸손해하던 사람이 자신은 정상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비정상이라는 태도로 바뀌는 게 순식간에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정상을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태도는 선거가 끝났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기에 아마도 뒤끝이 남은 듯하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나라 [뉴스룸에서] 1.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나라 [뉴스룸에서]

윤 대통령의 ‘부하’를 자처하는 최재해 감사원장[아침햇발] 2.

윤 대통령의 ‘부하’를 자처하는 최재해 감사원장[아침햇발]

[사설] 윤 대통령 “‘살상 무기’ 지원 검토”, 기어코 전쟁을 끌어들일 셈인가 3.

[사설] 윤 대통령 “‘살상 무기’ 지원 검토”, 기어코 전쟁을 끌어들일 셈인가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4.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러시아 몰아낸 독립협회 ‘자립투쟁’…일본, 만세를 부르다 5.

러시아 몰아낸 독립협회 ‘자립투쟁’…일본, 만세를 부르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