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단체협의회, 특권학교폐지촛불시민행동 등 교육·시민단체 회원들이 2019년 7월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날 발표된 자율형사립고 운영평가 결과를 비판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 프리즘] 황춘화 | 사회정책팀장
“영어는 초등학교 때 끝내야 해요. 서울 강남 초등학교 5~6학년들한테 수능 외국어영역 문제 줘보세요. 한반에 만점자가 10여명이에요. 수학은 초등 때 선행을 끝내기엔 머리가 부족하니까 영어 끝내놓고 중·고등학교에선 수학에 올인하는 거죠.”
“의대 가는 로드맵이 초등학교 5~6학년 때 중학교 수학 끝내고, 중학교 3학년 때 미적분·기하 끝내는 거예요. 초등 4~5학년 때 영재원 들어가면 금상첨화죠.”
몇해 전 대한민국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다는 강남 학부모들을 인터뷰하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더랬다. 선행학습이 없을 리 없겠지만, 학부모들 허풍이 좀 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몇년 아이를 키우며 깨달은 사실은, 현실은 그보다 더 치열하다는 것. 생각보다 많은 아이가 기저귀 차고 영어를 시작하고, 이름난 ‘학원’에 가기 위해 과외를 받는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줄 세워지고, 부모는 불안에 떤다. 결국 함께 사교육 컨베이어벨트에 일단 올라타 뛰고 보는 게 대한민국 현주소다. 이 길이 맞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열심히 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좋은 대학교’다. 승자독식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좋은 대학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유를 보장받는 가장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수단이다. 문제는 좋은 대학에 앞서 ‘좋은 고등학교’가 생겨버렸다는 사실이다. 2010년 이명박 정부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환경을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자율형사립고(자사고)를 만들었다. 그 전에도 비평준화 학교를 비롯해 소수의 자립형사립고와 외국어고, 과학고 등 특목고가 있었지만 비교적 제한적으로 운영돼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자사고 수가 54개까지 치솟으며 상황은 달라졌다. 자사고는 우수한 학생들을 강하게 빨아들이며 ‘입시 사관학교’가 됐고, 그 결과 고교서열화는 더 광범위해지고 보편화됐다. 아이들은 더 이른 시기부터 선행학습에 내몰렸다.
자사고뿐 아니라 어학영재, 과학영재를 양성하겠다며 설립된 특목고들은 설립 취지와 달리 입시학원이 됐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놨으니 결과가 나쁠 리 없다. 종로학원하늘교육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올해 서울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53개 학교 가운데 자사고가 11곳, 영재과학고가 11곳, 외고는 7곳이었다. 일반고는 16곳인데 그 가운데 절반은 강남·서초구 학교였다.
결국 2019년 정부는 고교서열화 해소를 위해, 2025년까지 자사고·외고·국제고를 일반고로 일괄 전환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시행령에서 자사고 설립 근거조항을 삭제하는 방식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일반고 일괄 전환 정책은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지만, 당시 교육부는 “교육정책은 큰 틀의 국가적인 정책의 연장선 위에서 진행됐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흔들림 없도록 국민적 신뢰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안타깝게도 ‘국가적인 정책’은 우려했던 대로 정권 교체와 함께 없던 일이 될 처지에 놓였다.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자사고 등을 현행대로 유지하는 방안을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다. 더욱이 인수위는 문재인 정부의 고교학점제는 이어받겠다는 입장이어서 자사고 등은 날개를 단 모양새가 됐다. 2025년 절대평가와 함께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유일한 단점이었던 내신(상대평가)의 불리함마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스카이 패스트트랙’의 완성이다. 사교육은 더 늘어나고, 부의 대물림과 불공정은 지금보다 더욱 심화될 게 뻔하다.
2020년 한국교육개발원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자사고 등의 일반고 전환을 찬성하는 학부모는 55.5%로 반대(16.9%)보다 3배가량 많다. 많은 부모는 빠르게 달리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내려가길 꿈꾼다. 다만 그런 선택이 추락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대한민국에 필요한 정책은 부모와 아이들에게 컨베이어벨트에서 내릴 기회를 주는 것 아닐까. 지금은 속도를 늦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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