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한 증권사 전광판 모습. 지난 20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129엔대로 2002년 5월 이후 20년 만에 엔화 가치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도쿄/AFP 연합뉴스
[세상읽기] 이강국 |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세계의 주요 통화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장 많이 가치가 하락한 통화는 무엇일까. 답은 바로 일본의 엔화다.
엔화 가치는 2월24일 달러당 115엔에서 두달 뒤 129엔으로 약 12%나 하락했다. 정작 러시아 루블화는 전쟁 직후 40%가량 폭락했지만 두달 뒤에는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20년 만에 최저고, 다른 통화들 대비 엔화의 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실효환율도 50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과거 엔화는 세계의 안전자산으로 위기 때마다 가치가 높아졌다. 일본 경제는 오랫동안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고, 일본인들은 이를 해외에 투자해 2020년 말 기준 대외순자산이 약 357조엔으로 30년째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세계 경제에 충격이 발생하면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해외에 투자했던 엔캐리 트레이드가 일본으로 복귀하여 엔화 강세 현상이 발생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과거와 정반대다.
최근 엔화 가치가 추락한 배경엔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급등하는 인플레에 대응해 금리를 급속히 인상할 계획이지만 일본은행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10년 국채금리는 이제 2.9%로 높아졌는데, 일본은행은 최근에도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상승하자 국채를 무제한 매입해 금리상한 0.25%를 유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금요일에도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지속할 것이라 말했으니, 투자자에게 엔화는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장기불황과 디플레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된 아베노믹스의 후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은행은 2013년 양적 완화에 나섰고, 2016년 이후 기준금리와 장기국채금리를 각각 -0.1%, 0% 정도로 통제하고 있다. 아베노믹스 초기에는 엔화 약세로 수출 대기업의 이익이 커졌고, 저금리 덕분에 국채의 금리 부담도 낮아져 재정이 안정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미국과 유럽에 비해 일본은 여전히 경기는 부진하고 물가상승률은 낮다. 3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대비 1.2% 높아졌지만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지수는 0.7% 낮아졌다. 이렇게 낮은 인플레와 늘어나는 국채를 고려해 일본은행은 확장적 통화정책을 계속할 계획이지만, 엔화 가치가 타격을 받고 있으니 일종의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에너지와 곡물 가격 상승으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전환 가능성도 엔화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무역수지는 3월까지 8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 1월은 무역수지 적자가 커서 경상수지도 1조6천억엔 적자를 기록했다. 일본은 해외 투자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에 기초해 경상수지는 흑자를 기록해왔는데, 올해는 그마저 확실하지 않다. 경상수지 적자는 엔화에 하락 압력을 주고 이는 무역수지 적자와 엔 투매를 낳는 악순환을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엔화 약세가 수출을 촉진한다면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엔화 가치가 10% 하락하면 수출 증가로 연간 경제성장률이 약 0.8% 높아질 것이란 전망도 제시된다. 하지만 최근 일본 기업들의 해외 생산이 늘어나 엔화 약세의 수출 효과는 크게 줄어들었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일본 제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은 10년 전 약 17%에서 최근 25%까지 높아졌고, 특히 자동차 회사들은 약 3분의 2를 해외에서 생산하고 있다. 기업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엔화 약세가 도움이 아니라 부담이 될 것이라 대답한 기업이 훨씬 많았다.
엔화 하락은 시민들의 생활에 직접 타격을 주고 있다. 이미 지난 10년 동안 식료품 등 수입물가가 크게 올랐는데, 3월에는 엔화의 급락으로 에너지와 곡물 가격이 급등해 수입물가지수가 전년보다 33%나 높아졌다. 휘발유 가격이 급등하자 정부는 보조금을 확대했지만, 식료품 가격도 줄줄이 오르고 있다. 문제는 임금인상이 오랫동안 부진한 현실에서 생필품 가격이 상승하면 개인 소비가 더욱 위축돼 경제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정치인이 되기 전 1980년대 일본의 장기신용은행에서 외환업무를 담당했다. 이제 세상은 크게 바뀌었고, 최근 엔화의 추락은 그와 일본 경제에 매우 어려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일본에 필요한 것은 역시 확장적 통화정책을 넘어 기업의 생산성 상승을 통한 경쟁력 강화, 그리고 임금인상과 내수 활성화에 기초한 경제회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