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발표한 다음 정부 총리 및 장관 후보자와 관련하여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그 가운데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있다. 정 후보자는 경북대학교병원의 부원장과 원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자녀 둘이 경북대 의대로 편입한 문제와 또 아들의 병역 판정 변경의 근거가 된 진단서 발급에도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관련 의혹에 대해 언론은 충분한 검증 보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검증 보도를 하자면, 당선자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관계자뿐 아니라 경북대 당국, 경북대 편입학 담당자, 진단서 담당 의사 등을 주 취재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뉴스1> <연합뉴스> <중앙일보> <세계일보> <서울경제>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등의 담당 기자들이 위 취재원 말고도 바쁘게 쫓고 있는 취재원이 있었으니, 경북대 ‘에브리타임’이었다. 에브리타임은 전국 400여개 대학에 익명 게시판을 제공하는 온라인 서비스 명칭이다. 여러 언론사 기자들은 마치 경북대 에브리타임에 관련 글이 올라오기를 잠복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게시판에 게시된 글을 갈무리하고 퍼 나르며 기사를 썼다.
그런데 그 기사는 기껏해야 ‘경북대 익명 게시판에 이런 의견도 있더라’는 정보 외에 대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경북대 학생들 전수조사를 하면 익명 게시판 의견이 극소수이거나, 이런 사건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다수로 확인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경북대 재학생들의 전체 의견이 어떤지는 나도, 그 기사를 쓴 기자도 모른다는 것이다.
4월18일 <세계일보>에는 ‘“저학력이 벼슬”… 박지현 논란이 드러낸 한국식 능력주의 민낯’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온라인 커뮤니티 달군 ‘지방대 학벌’’, ‘“한림대 출신이 무슨 정치냐” 비판 댓글’ 등의 소제목을 달고 있었다. 기사 첫머리는 서울대학교 익명 게시판 ‘스누라이프’에 올라온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글 인용으로 시작하여, ‘능력주의’ 비판에 대한 여러 주장들을 소개하고 끝을 맺는다. 전체 내용으로 보건대 기사가 전달하는 정보는 상당히 심도 있고 논지의 전개 또한 충분히 수긍할 부분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서두를 장식한 스누라이프 익명 게시글 인용 부분이다. 익명 게시글 몇개 때문에 서울대 재학생들 전체가 학벌주의에 찌든 사람들로 비난받을 우려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꽤 오래전부터 대학 익명 게시판의 글을 소재로 삼는 언론 기사들이 불편했다. 좁게는 해당 글이 해당 학교 학생들의 의견을 얼마나 대표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편집되어 활용되면서 해당 학교 학생 다수가 여론의 평가를 받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심각한 건 대학 내 공론장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대학 익명 게시판은 사회적 사건에 대한 의견만이 아니라 학내 사건에 대한 의견, 강의 평이나 정보 교환 등의 여러 기능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언론 보도가 횡행하게 되면 학내 게시판 이용자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언론의 타깃이 되는 게시판이 스누라이프와 고려대 익명 게시판 ‘고파스’ 등 일부 대학에 한정되면서 인용된 몇몇 이들의 의견이 마치 이 시대 대학을 다니는 청년 시민의 대표적 의견인 것처럼 포장된다는 점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빅카인즈’ 검색 결과, ‘대학’과 익명 게시판 에브리타임, 스누라이프, 고파스 키워드 기사는 2017년 121건, 2018년 129건이었던 것이 2019년 1068건으로 급증했다가 2020년 496건, 2021년 423건으로 다소 줄었지만, 2019년 이전에 비해 서너 배 증가한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서울대 스누라이프와 고려대 고파스 게시글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89.6%, 2020년 58.5%, 2021년 47.8%였다.
극히 일부 대학에, 특정 시점, 익명으로 게재된 글 몇편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음대로 포장하는 일은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이런 기사는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을 익명의 관계자 입을 빌려 쏟아내는 무책임한 기사들보다 훨씬 나쁘다. 익명의 관계자발 기사는 이름을 밝히지 않을 뿐 관계자 스스로 기자에게 한 말이라 치지만, 대학 익명 게시판에 쓴 글은 기자분들 당신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