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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토론의 즐거움

등록 2022-04-21 16:02수정 2022-04-22 17:42

인간은 누구나 받은 대로 되갚으려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 주장의 약점이나 허점을 찾아내려 혈안이면 상대도 똑같이 대응할 확률이 높아지고, 결국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만다. 거창한 명분을 걸고 시작한 대부분의 토론이 환멸과 냉소로 귀결하는 이유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13일 <제이티비시>(JTBC) 프로그램 ‘썰전라이브’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일대일 토론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13일 <제이티비시>(JTBC) 프로그램 ‘썰전라이브’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일대일 토론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최근 마음 맞는 이들과 시작한 프로젝트 때문에 ‘토론’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다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토론을 보게 됐다. 이준석 대표는 “전문가로서 리프트 선호하십니까, 저상 선호하십니까”라고 물었고, 박경석 대표가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요”라고 답한다. 그러자 이 대표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전문가의 답변이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라고 말했다.

이준석의 조롱과 달리, 박경석 대표의 저 말이야말로 ‘진짜 전문가’의 답변이다. 어떤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오랜 기간 지식을 쌓아본 사람은 안다. 이 세상에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란 거의 없다는 것을. 리프트냐 저상이냐는 장애인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나 공간에 따라 효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토론자였다면 “전문가라면서요” 운운하며 공격하는 대신 이해를 돕기 위한 사례를 요청했을 것이다.

시종일관 말꼬리를 잡거나 실언을 유도하는 이준석 대표와 달리 박경석 대표는 이기려 들지 않았다. 그는 끈질기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부탁했다. 애초에 박 대표는 토론을 승부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토론의 승패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장애인 의제를 알리는 것이고, 그랬기에 젊은 정치인의 무례를 참아가며 끝까지 의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한때 토론이란 상대를 지식과 논리로 찍어 누르는 것이라 믿었다. 강준만의 ‘실명 비판’과 진중권의 게시판 논쟁을 실시간으로 보며 ‘키보드 배틀’을 벌이던 시절도 있었다. 다만 이들이 그런 논쟁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아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소위 운동권들은 그런 토론을 일상적으로 벌였다.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최대한의 자극적인 표현으로 지적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강퍅한 토론방식은 이른바 86세대 운동권 사이에서 절정을 이뤘다. 어쩌면 마르크스의 신랄한 말투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기원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러한 86세대 일각의 토론문화를, 이준석의 ‘토론배틀’에 열광하는 청년들도 공유한다는 점이다. 팩트, 데이터, 논리를 강조하는 것도 판박이다. 이른바 엑스(X)세대, 그리고 엠제트(MZ)세대는 틈만 나면 86세대를 욕하지만 정작 ‘86세대스러운’ 토론문화 자체에는 문제의식조차 없어 보인다. 상대를 당혹시키고 궁지로 몰아세우는 것이 지상과제라는 점에서 86세대와 이준석의 토론은 본질적으로 똑같다.

지식과 논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선해’ 즉 상대 주장을 최선의 형태로 이해하려는 태도다. 인간은 누구나 받은 대로 되갚으려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 주장의 약점이나 허점을 찾아내려 혈안이면 상대도 똑같이 대응할 확률이 높아지고, 결국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만다. 거창한 명분을 걸고 시작한 대부분의 토론이 환멸과 냉소로 귀결하는 이유다. 상대방을 선해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이어서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이분법의 적대적 공생’을 깨트리기 위해서다. 상대의 최악을 물고 늘어지고 이를 알리바이 삼아 자신의 억지를 정당화하는 행태는 보수양당 독점구조뿐 아니라 반일·친일 구도 등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심각한 폐단이자 공론장을 망가뜨린 요인의 하나다.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우리의 토론부터, 정확히는 토론의 ‘태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물론 의도적 프레이밍으로 선동만 일삼는 상대에게는 이런 태도만으로 효과를 볼 수 없다. 이 경우 상대의 프레임을 무시하고 제3자 청중에게 초점을 둬 말하는 등의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다만 처음에 상대의 태도가 내 기준에 못 미치고 그래서 상대가 나를 배신할 수 있다는 ‘용의자의 딜레마’가 머리에 아른거리더라도, 굳이 따지지 않고 일단 먼저 선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목숨 건 도약’이 실제 신뢰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박경석 대표는 내내 힘들어 보였다. 시종일관 웃던 이준석 대표도 정말로 유쾌해서 웃은 것은 아니었을 게다. 모두가 긴장하고 남는 것도 없는 이런 토론, 이제 그만두자.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고 서로의 주장을 최대한 선해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토론이 글자 그대로 ‘즐거워지는’ 순간이다. ‘토론의 즐거움’은 가능하다.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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