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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사망률 99.993% 절멸수용소에서 나오는 길에…

등록 2022-04-19 18:07수정 2022-04-20 02:35

제노사이드의 기억 폴란드 _05
폴란드 트레블린카에만 희생자들의 울음이 있었겠는가. 모든 학살 터에 있었을 것이다. 사진기만 둘러메고 허투루 헤집고 다녀서 내가 알아채지 못했고 못 들은 것일 테니 결국 마음가짐이 문제였다. 허기진 배를 불리듯 내 눈과 머리만 채우고 돌아선 죄스러움에 나는 이제야 머리 숙여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빈다.

90만명이 넘게 학살당한 트레블린카 절멸수용소 터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1만7000여개의 돌덩이가 놓여 있다. 일부 돌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트레블린카/김봉규 선임기자
90만명이 넘게 학살당한 트레블린카 절멸수용소 터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1만7000여개의 돌덩이가 놓여 있다. 일부 돌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트레블린카/김봉규 선임기자

나치는 주요 절멸수용소 6개를 운영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 있었다. 그 가운데 규모와 사망자 등을 고려하면 제일 악명 높은 곳은 트레블린카 절멸수용소다. 하루에 최대 2만5000명을 학살했다. 사망률이 99.993%에 이른다. 수용소에 들어오는 즉시 죽였다. 홀로코스트 박물관 누리집은 이곳에서만 약 92만5000명이 학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절멸수용소는 수감자들을 분류하는 작업 없이 바로 가스실로 보냈다. 이곳에서는 독가스(치클론 B)가 아닌 노획한 소련제 탱크 T-34 엔진의 배기가스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를 사용했다. 20분이면 모두 죽었다.

트레블린카 절멸수용소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북동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마우키니아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기념관은 시골 동네 우체국 크기로 작았다. 전시실 안에 수용소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증거물들은 없었는데, 한가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한 생존자가 펜으로 그린 A4 정도 크기의 그림 한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용소 마당에 산처럼 쌓인 시신 더미가 그려져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만명 이상이었다. 그림 아래쪽에는 수용소 내 막다른 기차선로에 도착한 기차 화물칸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사진 한장 존재하지 않은 현실에서 이 그림 한점이 당시의 상황을 유일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나서서 10분 정도 걸어가니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돌덩이(화강암) 1만7000여개가 놓여 있었다. 돌의 크기는 사람의 허리 정도 높이였고,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는 돌도 보였다. 당시 수용소 터를 살펴보기 위해 화살표를 따라서 마냥 걷다 보니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터만 나타났다. 이곳 트레블린카도 여러 절멸수용소처럼 모든 시설물이 파괴되어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셔터를 누를 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이곳까지 나는 와 봤다는 스스로의 위안만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돌아서는 순간 뒤에서 뭔가가 나를 끌어당겼다. 팽팽한 밧줄로 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엔 나뭇가지에 배낭이 걸린 줄 알고 손으로 휘저으며 뒤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길은 작은 길이 아닌 신작로였다. 나는 계속 잡아당기는 기운에 눌려 큰 소리로 “제발 앞으로 나가자, 제발 제발”을 외쳤다. 그 기운의 크기는 한발 앞으로 내디딜 수 없는 것은 물론, 뒤로 넘어질 정도였다. 33년 동안 기자로서 사고 현장이나 끔찍한 장소를 수없이 다녔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기운’은 두려움이나 공포에서 오는 느낌이 아니었다. 한발짝 앞으로 나가는 데에도 힘이 부쳐 10분 거리를 40~50분이나 걸려 겨우 추모비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 기운의 세기는 그제야 약해졌다. 다만 그 기운은 수용소 터를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계속 느껴졌다. 15년 동안 학살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런 기운을 두번 느꼈다. 제주 4·3 당시 사람들의 은신처였던 도틀굴과 트레블린카였다.

그 기운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누구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그 ‘기운’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신과 전문의와 심령학자, 종교인을 모두 만나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던 차에 김성례 교수의 책 <한국 무교의 문화인류학>에도 소개된, 학계와 문화계 등에서 폭넓게 활동하는 이해경 만신과 내가 경험한 ‘기운’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당신에게 나타난 현상은 일반적으로 귀신에 씌었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 영혼들을 접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트레블린카에서 잠든 90만 원혼들의 울음이라고 덧붙였다. 그 울음에 대해선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김 기자와 소통을 원했고, 원통함을 더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는 신호”였다고 쉽게 풀어 설명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조금 평범하게 들릴 수 있는 해석이었지만, 나는 그 ‘기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폴란드 트레블린카에만 희생자들의 울음이 있었겠는가. 인간인 나로서는 증명할 수 없지만 모든 학살 터에 있었을 것이다. 그 시그널이 작아서가 아니라, 사진기만 둘러메고 허투루 헤집고 다녀서 내가 알아채지 못했고 못 들은 것일 테니 결국 마음가짐이 문제였다. 허기진 배를 불리듯 내 눈과 머리만 채우고 돌아선 죄스러움에 나는 이제야 머리 숙여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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