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8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5일 낮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단원고 4.16기억교실 책상에 추모리본이 놓여 있다. 안산/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세상읽기] 조형근ㅣ사회학자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 <피에타>로도 유명하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비통 앞에서는 신앙과 별개로 누구나 숙연해진다. 북적대던 인파가 <피에타> 앞에서는 조용하다. 음악도 그렇다. 몬테베르디의 <성모의 저녁기도>나 페르골레시의 <비탄의 성모> 같은 바로크 성가곡을 듣다 보면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숭고한 슬픔에 감정이 한껏 고양된다. 고통의 미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정수가 여기 있다.
그 아들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허리는 창에 찔린 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철철 흘렸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보는 어미가 <피에타>처럼 절제된 슬픔을 머금을 수 있었을까? 바로크 성가곡들에서처럼 고귀하게 슬픔을 정화할 수 있었을까? 그랬을 리 없다. 미친 듯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했을 것이다.
실은 그런 피에타도 있다. 중세 말, 라인강 중류 지역 무명의 예술가가 만든 <본 피에타>(혹은 <뢰트겐 피에타>)가 그렇다. 르네상스가 예술적으로 승화하기 전이어서일까? 아들과 어미의 고통이 적나라하다. 예수는 “극심한 고통 끝에 지치고 말라서 죽어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고, 마리아는 “너무나 많은 눈물을 쏟아내어 이제는 더 이상 흘릴 눈물마저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다. 그 광경이 아름다울 리 없어서 차라리 공포와 혐오에 가깝다. 미술사학자 신준형의 저작 <뒤러와 미켈란젤로: 주변과 중심>이 알려주는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 뒤 16일 만에 닻줄에 걸려 올라온 어떤 딸 앞의 아버지 마음도 그랬을 것 같다. 그토록 그리던 딸이 올라왔는데 얼굴이 없었다. 과학수사대 책임자는 아버지에게 차마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자꾸 말을 돌렸다. 계속 추궁하자 결국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 머리카락이 몇개 없습니다.” 올라온 다른 아이 얼굴을 다 확인했던 아버지가 끝내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누구도 얼굴을 볼 수 없게끔 얼굴을 싸매서 봉해달라”고 부탁한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 펴낸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나오는 이야기다. 종교도, 예술도 승화시킬 수 없는 인간의 슬픔은 이런 것이다.
그날 이후 8년이 흘렀다. 속절없이 또 한해가 간다. 그날 죽어가는 국민을 방기했던 전 대통령은 자칭 ‘촛불정부’에서 사면받고 정치적 재기를 꾀하고 있다. 단식도 하고 철저한 진상 규명도 약속했던 현 대통령은 임기 5년이 다한 지금, 아직도 밝힐 진실이 있다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달라 당부했다고 한다.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화법이다. 진상 규명과 재난 예방 및 대응 방안 수립을 책임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는 6월10일이면 끝난다. 사고 원인을 두고 아직도 다툼이 있다고 한다. 답답하다. 쟁점과는 별도로 추진할 수 있었던 법적·제도적 개혁조차 지지부진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들 선한 의도만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들이지만 또 모였다. 4월16일, 내가 사는 파주에서는 지역의 그리스도교회와 이주노동자센터, 시민단체가 모여 세월호 참사 8주기를 기억하고 미얀마,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믿음이 없거나 달라도 함께 기도했다. 저녁에는 동네 협동조합 책방에 열두명의 조합원과 주민이 모여 세월호 기억 모임을 가졌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돌아가며 낭독하고, 마음을 포스트잇에 써서 모았다. 여기저기서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일본인 조합원은 울다가 끝내 말을 못 했다. 갓 조합원이 된 이십대 초반 여성 멤버가 이 모임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덕분에 몇몇 청년도 함께했다. 함께여서 할 수 있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도 그랬다. 대개 비슷할 것이다. 선한 의도를 갖고서도 서로 다투지만, 그래도 우리가 함께하는 이유다.
글을 쓰는 중에 날짜가 바뀌어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이다. 부활이 인간의 죄를 대속한 신의 아들이 육신으로 되살아난 사건을 가리킨다면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부활이 희생양이 된 이들이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라면 나는 그것을 믿는다. 오늘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부활을 고백하고 기도하고 싶다. 부디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