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연상 작용이 있었던지 <한겨레>가 <르몽드>처럼 한겨레 특집을 꾸릴 수 있을지 스스로 물어보았다. 물론 이러한 <한겨레> 구성원의 자기 드러냄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남은 드러내지만 자기는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홍세화 |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20여년 전 일이다.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가 새천년을 맞아 꾸렸던 특집 중에 ‘르몽드’가 있었다. <르몽드>가 <르몽드>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 구성원은 누구이며 신문 경영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을 각종 수치와 함께 소상히 밝혔다. 이는 ‘지식인에 관한 사회학’(sociologie des intellectuels)에 대한 <르몽드> 나름의 조응이었다. 피에르 부르디외 등이 주도한 이 사회학은 “지식인들에게 그들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도취적인 자유정신의 환각상태에서 깨어나게 하여 실제적인 행동에 있어서 자유를 확장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일반 지식인이 그러하다면, “취재와 논평 대상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며 강조하거나 축소하고 누락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언론(인)”에 대해선 더욱 너는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각종 매체가 범람하고 미디어 비즈니스맨들과 스핀 닥터들이 판치고 있는 탈진실과 확증편향의 시대에는 더욱 필요한 작업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당시 <르몽드> 구성원들의 평균 월급은 2만4천프랑(당시 환율로 약 400만원)이었고 신문사 경영 비용은 구독수입(45%)과 광고수입(55%)으로 충당되었다. <르몽드>는 매호 그 전날의 발행부수를 일 단위까지 밝히는데, 새천년을 맞아 구독수입 대 광고수입의 비율을 50 대 50으로, 즉 구독수입을 늘리는 쪽으로 목표를 설정했다.
내가 이 오래전 기억을 더듬은 것은 정권이 국민의힘으로 넘어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일종의 연상 작용이 있었던지 <한겨레>가 <르몽드>처럼 한겨레 특집을 꾸릴 수 있을지 스스로 물어보았다. 가령 한달 뒤 창간 기념일을 맞아 “민주주의는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를 다시 환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한겨레>를 만드는 구성원은 누구이며 연봉은 얼마나 되는지, 신문 경영 비용에서 구독수입과 광고수입은 각각 어떤 비율인지, 또 유가부수는 얼마나 되는지 밝히는 것이다. 또 내 눈에만 그렇게 비치는지 알 수 없지만 근래 현장 기자들의 취재력 결손을 일부 고참 기자들의 지적 역량으로 채우는 ‘지면의 사유화’ 경향이 보이는데, 어떤 원칙과 지침 아래 행해지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한겨레> 구성원의 자기 드러냄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레거시 미디어의 일원으로 사회를 조감, 분석, 비판, 평가하고, 공인을 모두 검증, 비판, 평가 대상에 올려놓고 있지만, “그러는 너는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는데?”라는 물음에는 비켜서 있다. 남은 드러내지만 자기는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성한용 기자의 기사 일부다.
“(…) 이번 대통령 선거를 민주당 관점에서 복기하면 2019년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2020년 총선 비례 연합정당 참여, 2021년 4·7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공천은 패착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민주당은 왜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을까요? 패착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문재인 대통령, 이해찬 대표, 이낙연 대표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겠지요. 그게 전부일까요? 저는 열성 당원과 지지자들의 과도한 열정도 작용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강한 압박이 당 지도부의 판단을 방해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봅니다(…).”
옳은 분석이고 평가라고 할 만하다. 다만 엄중한 누락이 있다는 점을 빼면. <한겨레>의 자기 돌아봄이 없는 것이다. <한겨레>는 대선 패배 뒤 민주당의 관점에서 대통령 선거를 복기하지만 <한겨레>를 복기하지 않는다. <한겨레>는 창간 이래 지켜온 원칙을 저버리고 “김정숙씨”를 “김정숙 여사”로 바꾸었다. 민주당은 당원 투표를 거쳤고, <한겨레>는 독자 투표를 거쳤다. 결과가 뻔한 요식행위였다는 점에서 둘은 판박이였다. 민주당 열성 당원들이 민주당에 패착을 두도록 작용했다면, 그들과 상당 부분 겹치는 <한겨레> 독자는 <한겨레>에 원칙을 저버리도록 작용했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산물 중 하나인 “민주당:당원=한겨레:독자”라는 등식과 그에 따르는 압박과 대응에 관한 분석과 고민, 성찰과 노력 없이, <한겨레>가 민주당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고 패착을 두지 않도록 비판 언론으로서 제구실을 다할 수 있었을까?
성한용 기자는 조국 사태와 관련된 이해찬 대표의 사과 기사는 <한겨레>에서 찾을 수 없었던지 <경향신문>에서 끌어왔다. 그리고 <한겨레> 사설 몇개를 가져와 민주당의 위성정당, 공천 행태를 비판했다고 말하지만, ‘민주당이 공천을 하지 않고 서울시장, 부산시장을 야당에 내어주는 일은 무책임한 처사’라는 내용의 외부 기고를 실어 민주당 지지자=한겨레 독자에 영합했던 사실은 누락했다. 신문은 지면으로 말한다. 가령 서초동 집회 때 “우리가 조국이다!”의 함성 앞에서 그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대신 함께 도취했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앞에 소개한 ‘지식인에 관한 사회학’에서 말한 “자기도취적인 자유정신의 환각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승전-검찰개혁”으로 점철된 문재인 정권 5년이 마감될 참이다. 내일 8주년을 맞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도 되지 않은 채,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 중인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목소리도 외면한 채, 오로지 ‘검수완박’만이 남았다는 듯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는 이명박근혜 시절과 달리, 문 정권 동안 ‘민주당 지지자=한겨레 독자’를 의식하면서(“독자 떨어져나간다!”) 이 칼럼을 써야 했다. 이번 칼럼에서 <한겨레> 독자와 구성원에게 나로 하여금 자기검열케 한 두가지 간극에 관해 솔직히 말하고자 한다. 감히 그것이 각자의 자유를 확장케 하는 데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첫째, 나에겐 노동(자)을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관리-통제, 시혜, 동원의 대상으로 보는 민주개혁세력에 대한 본원적 분노가 있다. 민주당과 국힘당이 서로 다투는 현상은 노동 배제와 통제에서 그들이 한 몸이라는 본질을 감춘다. 일부 골프를 치기도 한다는 구성원의 계급성도 작용할 터, <한겨레> 지면에서도 노동은 현상에 밀려나고 기껏해야 시혜의 대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둘째, ‘한겨레’라는 제호가 스스로 드러내는 민족주의적 편향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가령 ‘죽창’이 진영 간 싸움에 동원된 수사였다고 하겠지만, 이에 대한 <한겨레>의 자세는 나에겐 절망 수준이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한국이 아니듯 아베 정권이 일본이 아니며, 유니클로는 미쓰비시가 아니다. 일식집까지 유탄을 맞았다. 이 극우적 분위기에서 <한겨레>는 무엇을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