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푸틴의 최대 적은 21세기 자체다

등록 2022-04-14 16:24수정 2022-04-15 02:36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여야 의원을 대상으로 화상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여야 의원을 대상으로 화상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특파원 칼럼]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유럽인들이 보기에 위협은 대대로 동쪽에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페르시아, 훈족, 사라센인들, 몽골, 튀르크족이 그랬다. 현대에는 러시아가 두려움의 대상이다. 지금 유럽인들은 이를 다시 절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의 처지는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에 시달리던 동로마제국과 닮았다. 동로마는 자신들이 무너지면 유럽 기독교 문명 전체가 정복당할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다음 차례는 유럽 전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로마는 서유럽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우크라이나는 많은 지원과 응원을 받는 점에선 다르다.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에 시달리던 동로마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는 도움을 청하려고 1399~1403년 영국, 프랑스, 밀라노공국 등을 순방했다. 로마 교황, 덴마크 여왕, 아라곤(지금의 스페인의 일부) 왕에게도 특사를 보내 구원을 간청했다. 그는 환대받기는 했지만 장기 순방에서 빈손으로 돌아왔고, 동로마는 50년 뒤 1천년 역사를 마감했다.

많은 세월을 뛰어넘어 동쪽의 거대한 적과 맞서는 나라가 서유럽에 지원을 호소하는 방식은 말 그대로 초현실적으로 바뀌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외국 의회에서 대형 화면으로 화상 연설을 하면서 러시아군 격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 의회에서는 진주만 공습을 거론했다. 영국에서는 윈스턴 처칠의 연설을 빌려 썼다. 스페인에서는 나치의 게르니카 공습을 러시아군의 행위에 빗댔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을 상기시켰다. 침략당한 국가 지도자의 이동은 쉽지 않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어디든 화면에 나타나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시민들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수백년 전 동로마와 비교할 필요까지도 없다. 2차 대전 말기인 1945년 1~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얄타회담 등에 참석하려고 한달 넘는 기간 동안 배와 비행기로 2만2천㎞를 넘게 여행했다. 병약한 루스벨트가 그로부터 1개월여 만에 전쟁의 끝을 못 보고 눈을 감은 데는 장시간 여행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디지털 전쟁’이고 ‘실시간 전쟁’이다. 전쟁 상황과 러시아군의 행태는 현장에 달려간 기자들뿐 아니라 현지인들의 에스엔에스(SNS)로 즉시 전파된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참상을 바로 알게 된다. 그 속도만큼이나 공분도 빠르게 퍼진다. 척후병들이 목숨을 걸고 파악해온 적의 동향은 이제 민간위성 사진으로도 웬만큼 포착돼 세계인들에게 전파된다. 몇년 동안 진행된 아우슈비츠 대학살의 참상을 연합군이 그곳을 해방시킨 다음에야 세계인들이 안 때와는 너무 다르다.

러시아는 굉장한 사이버전 능력을 지녔다지만 세계 여론을 움직이는 사이버전에서는 완벽하게 패하고 있다. 폭로당하는 것은 군사적 무기력과 민간인 학살만이 아니다.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민가에서 귀중품은 물론 옷가지까지 약탈하는 행태가 인터넷을 타고 시시각각 전파된다. 점령지에서 수많은 여성을 성폭행하고 옷이며 신발까지 마구 털어 기차로 본국에 보내던 2차 대전 때 소련군의 범죄적이고 비루한 모습을 닮은 러시아군의 행태가 잇따라 공개되고 있다. 알렉산더 샬렌베르크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은 11일 카를 네하머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기 전 “사실상 도덕적으로 패전했다는 것을 그에게 직접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푸틴이 ‘도덕적 패전’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행동을 바꿀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또 전쟁을 일으키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21세기 전쟁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ebo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윤 대통령 “‘살상 무기’ 지원 검토”, 기어코 전쟁을 끌어들일 셈인가 1.

[사설] 윤 대통령 “‘살상 무기’ 지원 검토”, 기어코 전쟁을 끌어들일 셈인가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나라 [뉴스룸에서] 2.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나라 [뉴스룸에서]

윤 대통령의 ‘부하’를 자처하는 최재해 감사원장[아침햇발] 3.

윤 대통령의 ‘부하’를 자처하는 최재해 감사원장[아침햇발]

[사설]‘해병대’ 수사 방해하려고 공수처 인사 질질 끄나 4.

[사설]‘해병대’ 수사 방해하려고 공수처 인사 질질 끄나

러시아 몰아낸 독립협회 ‘자립투쟁’…일본, 만세를 부르다 5.

러시아 몰아낸 독립협회 ‘자립투쟁’…일본, 만세를 부르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