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여성의 분투를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서는 이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연대해 횡단보도의 보행신호 시간을 늘리는 데 성공한다. 넷플릭스 제공
김은형 | 문화기획에디터
“빨리 엄마한테 전화 좀 해봐.” 일하다가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카톡 봐 봐.” 개점휴업 중인 가족단톡방에는 좀처럼 전화 한번 안 하는 딸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이 담긴 엄마의 문자가 올라와 있었다. ‘아, 바빠 죽겠는데’ 구시렁거리며 전화를 했다. 나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말했다. “많이 멀지도 않은데 엄마가 우리 집 자주 와요.” 번거롭다거나 힘들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엄마가 머뭇거리다 답했다. “너랑 개똥이(아들)가 좋아하지 않을 거 같아서….” 마음 한쪽 모퉁이가 파삭하고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분홍색 꽃과 반짝반짝 비즈 가득한 셔츠를 입고, 나름 커리어우먼인 딸내미의 옷차림에 대한 강압적 코치를 주저하지 않던 엄마의 자신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지난해 초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은 뒤 보조도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고, 이즈음 청력 장애 판정까지 받으면서 엄마의 자신감이 북극 빙하처럼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 같다. 팔순 넘어서 걸음이 불편해질 수도 있지, 보청기 끼는 게 뭔 대수라고, 라고 자식들은 심드렁하게 엄마의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엄마의 생활은 그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코로나 유행으로 전국민의 발이 묶이면서 엄마가 갇히게 된 감옥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노년의 부모가 가지게 된 장애를 우리처럼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자식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노화는 건강이나 신체적 능력의 쇠퇴 또는 훼손과 직결되는 문제기 때문이다. 겪어보니 자식에게도 이 문제는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귀가 어두워진 엄마와 대화하기를 중단했다. 옷 얼룩 빼는 법이나 화분에 물주기 등 엄마한테 구하던 소소한 조언들을 더 이상 구하지 않게 됐다. 나들이나 여행 제안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엄마와 무언가 같이 하는 일이 전보다 조금 번거로워졌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했다. 하지만 엄마가 자괴감으로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 몸이 불편해 집안일도 잘 못하고 이야기도 나누기 힘들어진 엄마는 쓸모없는 존재일 것이라는, 그래서 자식에게 환영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그 마음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 모든 게 나의 무의식적 (효용가치에 대한) 판단과 배제로부터 시작된 것임에도 말이다.
우리 엄마가 그렇듯 운 좋게 비장애인으로 살았어도 나이가 들면 크고 작은 장애가 우리 삶으로 끼어든다. 닳아버린 관절은 이동의 권리를 박탈하고, 혹사한 눈과 귀는 문화적 향유는 물론 일상의 소통까지 막는다. 사실 십년 전에 이미 노안이 온 나에게도 장애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최근에는 다초점 안경과 컴퓨터 작업용 안경도 잘 맞지 않아 하루종일 안경 두개를 갈아 끼웠다, 올렸다, 내렸다, 벗었다를 반복한다. 청력도 부실해졌는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자막을 깔고 본 지도 꽤 됐다. 나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엄마처럼 나 역시 위축되곤 한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의 프린트물을 열심히 읽는 척을 한다거나, 누군가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옆 사람을 따라 큰 소리로 웃은 게 한두번이 아니다. 장애는 그냥 당사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것, 또는 감수해야 하는 핸디캡이라는 낡은 편견의 내면화다.
두 노년 여성의 분투를 유쾌하게 그린 미국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는 ‘횡단보도’라는 제목의 에피소드가 있다. 두 사람의 친구인 조안 마가렛은 대게를 싼값에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는, 최근 문 연 뷔페식당에 가는 게 꿈이다. 이게 왜 꿈이냐면 식당 앞에는 걸음이 불편한 그에게 태평양보다 드넓은 왕복 6차선 도로가 있기 때문이다. 큰맘 먹고 식당으로 향한 프랭키와 조안 마가렛은 ‘마의 20초 벽’을 뚫지 못하고 십여미터 횡단에 실패한다. 시청에 가서 도로 횡단 시간을 늘려달라고 하소연하다가 마침 담당 공무원이 다음날 도보 시간 실측 점검에 나선다는 걸 알게 된다.
이들은 친구들을 부른다. 휠체어 등 갖가지 보행 보조기구를 쓰는 친구 수십명이 함께 20초 벽에 도전한다. 빨간 신호로 바뀌자 옆 차들이 빵빵대고 난리를 쳤지만 함께했기에 이들은 이십초 벽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마지막 보행을 장식한 그레이스는 말한다. “나는 80살 여성이고 천천히 걸을 권리가 있어요.” 바꿔 말하면 어떤 핸디캡이 있는 사람이든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일 터다. 드라마가 보여준 노인들의 연대는 장애인들의 연대이기도 하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예약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단 하나의 연대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장애인들과의 연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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