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선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언제부터, 무엇이 그리도 죄송하고 미안했던 것일까. 원래 정치란 그런 거라고, 한때는 칼을 겨눠도 필요하면 손잡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게 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통합과 화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치장하기엔, 2016년 겨울 전국의 광장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염원이 가슴 아프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12일 오후 대구 달성군 유가읍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해 박 전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당선자 대변인실 제공
박찬수ㅣ대기자
지금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인, <한겨레> 기자였던 김의겸씨로부터 들은 얘기다. 김의겸 기자는 2016년 9월 최순실씨가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해서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의 물꼬를 튼 취재팀을 이끌었다. 그렇게 박근혜-최순실 비리를 파헤치던 그해 11월 윤석열 당시 대전고검 검사가 한겨레신문사로 김의겸 기자를 찾아왔다. 김 기자는 윤 검사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회사 앞 작은 식당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윤 검사는 찾아온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제이티비시>(JTBC)의 최순실 태블릿피시(PC) 보도로 국정농단 사건을 비로소 알게 됐지만, 나는 9월20일 <한겨레> 보도(‘K스포츠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센터장’)를 보고 아, 이건 심상치 않은 사건이구나 하는 걸 직감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엔 <한겨레>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에 밉보여 전국을 방랑하다 지금은 대전에 있는 내가 그 덕분에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 불쑥 찾아왔다.’
검찰을 오래 출입해 윤석열 검사와 친분이 있던 어느 기자는 2016년 4월 총선 이후, 당시 지방에 좌천돼 있던 윤 검사를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윤 검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총선 전에 민주당으로부터 강하게 출마 권유를 받았다. 하도 화가 난 상태라 민주당에 들어가 총선 접전지역을 돌아다니며 박근혜 정부에 타격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여러 사람이 만류해서 정치 입문을 포기했다.’
오래전 일이라 두 전·현직 기자가 기억하는 윤석열 검사의 워딩이 조금은 틀릴 수 있겠지만, 그의 발언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강한 분노를 읽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김의겸 기자에게 토로했듯이,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로 인해 지방을 떠돌던 그를 되살린 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그 뒤 윤 검사는 국정농단 수사를 위해 구성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수사팀장으로 발탁되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구속을 이끌어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는 건 세상이 다 안다. 그러나 누구도 윤 검사의 수사를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 표출’로 보진 않는다. 개인적 은원으로 사안을 재단하기엔, 비선으로 정부 시스템을 무너뜨린 국정농단 사건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뒤 12일 대구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찾아가 “면목이 없다. 늘 죄송했다”고 사과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담담히 듣기만 했다고 한다. 윤석열 당선자는 언제부터, 무엇이 그리도 죄송하고 미안했던 것일까. 원래 정치란 그런 거라고, 한때는 칼을 겨눠도 필요하면 손잡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게 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통합과 화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치장하기엔, 2016년 겨울 전국의 광장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염원이 가슴 아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책 계승도 하고 널리 홍보도 해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2016년 격정이 끓어오르던 윤석열 검사의 명예뿐 아니라 수백만 촛불 시민의 명예도 땅에 떨어져버렸다.
이제 한국 정치는 2017년 탄핵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국민의힘은 탄핵의 강을 거꾸로 건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지지기반 확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지난 대선 승리는 국민의힘이 국정농단 실패를 딛고 스스로 혁신과 변화를 통해서 국민 신뢰를 얻은 데 기인한 것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와 싸우며 대중적 인기를 얻은 윤석열 검사를 영입하고 민주당의 오만과 독선을 파고들어서 얻은 반짝 승리에 가깝다. 그런데 박빙의 승리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절반의 국민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탄핵의 의미를 부정함으로써 갈등과 분열의 전선을 날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의례적 수사일 순 있겠지만 윤 당선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언급한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내각과 청와대를 어떻게 운영했는지 자료를 봤고…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국 정치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확립한 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1960년대 박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비서실은 비약적으로 커졌고 국정 사령탑으로 자리잡았다. ‘제왕적 대통령’을 끝내기 위해 청와대에선 하룻밤도 잘 수 없다며 집무실 이전을 다급하게 추진하면서, 가장 제왕적이던 대통령을 롤모델로 삼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 이런 식의 가치 혼선과 비전 부재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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