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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소포클레스 합창이 들려주는 ‘지배와 복수의 변증법’

등록 2022-04-12 18:30수정 2022-04-15 12:20

고명섭의 카이로스
눈앞의 탐욕에 이끌려 자연을 식민화한 인간의 오만은 자연의 보복을 부른다. 인류의 삶을 위협하며 밀려오는 기후 위기와 생태 위기가 그 보복의 징조일 것이다. 계몽 이성이 신화적 허구라고 내쳐 버린 ‘온 생명의 성스러움’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생태적 상상력이 포착하고 되찾아야 할 세계의 진실일지 모른다.

돛대에 몸을 묶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오디세우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돛대에 몸을 묶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오디세우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죄르지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 첫머리를 어두운 감탄문으로 장식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가 그리움으로 돌아본 시대는 서구 역사의 시원을 이루는 호메로스의 시대다. 루카치는 저 먼 서사시의 시대를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대로 이상화했고, 서구의 역사를 그 세계가 허물어져 가는 긴 과정으로 보았다. <소설의 이론>이 출간된 1916년은 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유럽을 뒤흔들던 때였다. 우울의 기분이 글머리를 물들인 데는 시대의 분위기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루카치의 마음에는 아직 희망의 불씨가 살아 있었다. <소설의 이론>은 행복했던 옛 시대를 다시 불러올 수 있으리라는 낙관 섞인 기대와 함께 끝난다.

그러나 20여년 뒤 두번째 세계대전이 터지고 파시즘의 레비아탄이 유럽을 삼키자 루카치의 후배들은 그 엷은 낙관의 빛마저 잃어버렸다. 절망이 희망을, 부정이 긍정을 압도했다. 그런 암흑의 시대 인식을 기록한 책 가운데 하나가 <계몽의 변증법>이다. 히틀러의 독일을 탈출한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그 책을 1940년대 초반에 망명지 미국에서 썼다. 그 책에서 두 사람은 유럽 문명의 참화를 ‘계몽의 자기 파괴’로 보았다. 유럽 문명이 키운 ‘계몽 이성’이 자연으로부터 마법의 힘을 빼앗아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마자 역으로 인간과 문명과 자연을 파괴하는 길에 들어섰다는 진단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생존의 숨구멍을 제공해준 미국마저 ‘계몽 이성의 자기 파괴’ 운명에 갇혀 있다고 보았다.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계몽 이성의 ‘전체주의’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절망스러운 시대 인식이었다.

그렇다면 계몽 이성은 언제 처음 출현한 것일까? <계몽의 변증법>은 먼저 17세기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을 주목했다. 베이컨은 자연에 대한 정복 의지를 담아 이렇게 썼다. “인간의 우월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식’에 있다. … 우리는 말로만 자연을 지배할 뿐이고 자연의 강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의 인도를 받아 발명에 전념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베이컨이 말한 그 ‘지식’을 추구해 ‘자연의 강압’을 이겨내고 자연을 인간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는 것이 계몽이다. 그러나 계몽의 승리는 베이컨의 기대와 달리 자연의 보복을 낳았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강압을 분쇄하려 하는 모든 시도는 자연의 강압 속으로 더욱 깊이 빨려 들어갈 뿐이다. 이것이 유럽 문명이 달려온 궤도다.”

<계몽의 변증법>은 베이컨의 말에 주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상가를 계몽 이성의 출발점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베이컨은 계몽 이성이 경유하는 근대의 기착지일 뿐이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 이성의 출발점을 찾아, 루카치가 그리움으로 회고한 호메로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두 사람은 <오디세이아> 주인공의 내면에서 계몽 이성이 막 깨어나 활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의 동굴에 갇혔을 때 쓴 계략이 그런 사례다. 거인이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오디세우스는 그리스어로 ‘우데이스’(oudeis)라고 답한다. 영어로 하면 ‘노바디’(nobody)에 해당하는 말이다. 키클롭스가 술에 취해 쓰러지자 오디세우스 무리는 커다란 꼬챙이로 거인의 외눈을 찌른다. 키클롭스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이웃 거인들이 달려와 ‘누구 짓이냐’고 묻자 키클롭스는 ‘우데이스(노바디)’라고 소리친다.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니 거인들은 모두 돌아가고, 눈이 먼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의 탈출을 막지 못한다. ‘이름 감추기’ 계략이 승리한다.

<계몽의 변증법> 저자들이 ‘키클롭스 이야기’보다 더 주목하는 것은 ‘세이렌 이야기’다. 마녀 키르케의 땅을 떠난 오디세우스의 배는 요정 세이렌 자매가 사는 섬을 지나간다. 세이렌들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목숨을 빼앗는다.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은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온몸을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한다. 또 부하들은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밀랍으로 귀를 막는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묶고 귀는 열어놓음으로써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그 노래에 홀려 자신을 아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바로 이 계략이 자연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자연의 마법을 정복하는 계몽 이성의 본질을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서사시의 세계는 신화적 자연이 계몽 이성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계다. 또 오디세우스는 앎을 향한 무한한 갈망을 품고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근대적 모험가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오디세이아> 이야기 가운데 일부를 전체로 확장해 얻어낸 것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미국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쓰고 있던 즈음에 마르틴 하이데거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오디세우스를 강의의 소재로 삼았다. 그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오디세우스를 새로운 것을 찾아 미친 듯이 달려가는 모험가로 보는 <계몽의 변증법> 식 해석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오디세우스는 먼 곳을 동경하며 낯선 것을 찾아 모험하는 정신이 아니라 고향 이타카를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모험’이 아니라 ‘향수’다. <오디세이아> 전체를 놓고 보면, 하이데거의 해석이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해석보다 더 사태의 진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에 돌아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오디세우스의 배는 고향에서 멀어진다. 키클롭스의 아버지 포세이돈의 분노가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막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자연의 원초적 힘을 극복한 인간이 아니다.

자연의 힘에 맞선 계몽 이성의 투쟁과 승리의 원형을 보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 작품을 살피는 것이 낫다. 이를테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기원전 441)가 그런 작품이다. 이 비극에서 눈여겨볼 것이 테베 원로들이 부르는 합창이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두렵고 무서운 것은 많지만 아무것도/ 인간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나니,/ 겨울의 남쪽 바람을 타고/ 인간은 거품 이는 망망대해를 향해 돌진하여/ 광란하는 파도를 가로질러 항해하는구나.” 계속해서 합창은 인간의 힘을 노래한다. ‘인간은 대지를 갈아엎어 땅의 기운을 고갈시키고, 하늘의 새 떼와 들판의 짐승과 바다의 어류를 모조리 잡아들이며, 말과 소를 길들여 가축으로 삼고, 도시를 세워 다스린다.’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인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라는 얘기다.

이 합창의 내용은 <안티고네>의 줄거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작가 소포클레스가 합창 형식으로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합창 제3연에서 소포클레스는 말한다. “곳곳으로 경험을 쌓으러 돌아다니며 결국엔 아무런 경험도 얻지 못하고 막다른 길에 이르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무)에 이르고 만다.” 불굴의 모험 정신으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복속시키지만 끝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무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얘기다.

이 합창이야말로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가 <오디세이아>에서 찾아내려 한 ‘계몽 이성의 자기 파괴’를 한층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자연 세계의 힘을 제압해 이성의 지배 아래 두지만, 그런 승리를 비웃듯이 인간의 삶은 무와 죽음으로 끝나고 말리라는 것이 합창의 묵시록적 경고다. 계몽 이성이 비웃은 ‘신화의 언어’로 말하면 무와 죽음이라는 결말은 ‘가이아의 복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눈앞의 탐욕에 이끌려 자연을 식민화한 인간, 그 인간의 히브리스 곧 오만은 훨씬 더 ‘두렵고 무서운’ 자연의 네메시스 곧 보복을 부른다. 인류의 삶을 위협하며 닥쳐오는 기후 위기와 생태 위기가 그 네메시스의 징조일 것이다. 계몽 이성이 신화적 허구라고 내쳐 버린 것, 이를테면 ‘온 생명의 성스러움’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생태적 상상력이 포착하고 되찾아야 할 세계의 진실일지 모른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 시기, 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하려 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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