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신선대부두에서 수출 컨테이너 화물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이원재 | LAB2050 대표
“의견: 반영곤란.” 통계청장 명의의 공문이 날아왔다. 2월에 ‘새로운 통계 작성에 대한 청원’을 보냈는데, 이에 대한 거절 회신이었다.
2월에 나는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경제뿐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가치를 보완해 국내총생산(GDP)을 대체하는 국가발전지표를 만들어야 하며, 정부는 이를 정책수립에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청원서 형식으로 통계청에 보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 등 각계 전문가와 활동가 600여명이 참여한 청원이었다.
청원자들의 배경은 각기 달랐다. 하지만 생각은 일치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의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서, 과학자와 환경운동가들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 기업가와 투자자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을 위해서, 국가 운영에 새로운 성과지표가 필요하다고 했다.
통계청에 보낸 청원서에서 우리는 “지디피 중심의 양적 성장모델은 한계에 부닥쳤”고, “성장하는데도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위기가 앞당겨지”며, “성장해도 불평등은 커지고 소외계층의 박탈감은 커지기만” 한다고 지적했다. 랩2050이 환경, 불평등, 여가와 가사노동 시간, 디지털의 가치 등을 포괄해 설계한 대안 지표인 ‘참성장지표’ 연구 결과를 참고자료로 전달했다.
통계청장의 답변은 아쉽다. 청원자들은 시대정신을 담은 국가지표를 개발하자고 했는데, 통계청장은 ‘계산이 어렵고 국제 비교가 곤란하다’는 기술적 답변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지디피도, 처음 나왔을 때는 통계적으로 정교한 지표가 아니었다. 기술적으로는 거칠었지만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데 적합한 도구여서 성공한 지표였다.
처음 지디피를 고안한 사람은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였다. 1933년 미국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쿠즈네츠에게 ‘국가 경제 전체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경제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서, 주식 가격처럼 피상적이고 불안정한 지표에 의존하던 때였다. 대공황 이후 정책의 성과지표로 삼을 지표가 필요했다.
쿠즈네츠는 척박한 환경에서 시작했다. 보조원 세명과 통계사무원 다섯명이 그가 거느린 조직의 전부였다. 이들과 함께 쿠즈네츠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농장과 공장, 광산 등 생산시설을 방문해 조사를 수행했다. 수많은 불완전한 데이터를 끼워 맞추며 국민계정을 만들었다. 1934년 ‘국민총생산’ 개념이 드디어 첫발을 떼게 된다. 국민총생산은 이후 지디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지표는 허점이 많았다. 몇몇 조사를 중심으로 전체 경제를 추정해야 했고, 국제 비교도 불가능했다. 쿠즈네츠도 이를 인정했고 조심스럽게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그럼에도 대공황이 가져온 문제를 치유하는 정책수단을 찾던 루스벨트에게는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이 지표 덕에 대공황이 불러온 경제적 불평등을 알게 됐다. 공장 노동자들이 사무직 노동자보다 대공황의 피해를 더 많이 봤고, 자산소유자들은 큰 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책 대안은 노동권과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쿠즈네츠의 국가발전지표는 이렇게 ‘뉴딜정책’의 근거가 됐고 물질적 생산과 분배를 복원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시대정신을 구현할 지표가 필요하다. 다만 시대정신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우리나라는 ‘먹고사는 일’이 압도적 시대정신이던 시대를 지나왔다. 환경적, 사회적 가치를 희생하고 민주주의도 미뤄두며 수십년을 달려왔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지표가 지디피다.
지금의 과제는 물질적 성장에 그치지 않는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극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복합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에 걸맞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설정해야 한다. 이런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단으로, 새 국가발전지표를 설정해야 한다.
시험 과목은 공부 방법을 좌우한다. 우리나라는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 과제이던 시절, 지디피라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 열심히 양적 성장을 일궜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과 인권 같은 가치도 먹고사는 일만큼 중요한 시대다. 새로운 시험 과목이 필요하다. 지디피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지표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통계청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