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정대건 | 소설가·영화감독
원주 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은 박경리 선생님께서 후배 작가들을 위해 지으신 레지던시다. 내가 이곳에서 머무르며 밥걱정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선생님께서 후배 작가들이 오로지 글쓰기에만 집중하도록 배려한 덕이다. 작가들에게 공간을 제공하는 레지던시들은 꽤 있지만 이곳에서는 일용할 양식이 제공된다. 텃밭에서 키운 유기농 채소로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이른 점심과 이른 저녁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달래무침, 궁채나물볶음, 모두 이곳에서 처음 먹어본 맛있는 음식들이다.
그렇게 원주 산골에 고립되어 휴먼 디톡스를 제대로 하고 있다. 내게 빼내야 할 축적된 사람 독소가 뭐가 있을까. 연출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현장의 기억은 생생하다.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인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때 받았던 극도의 스트레스가 어떤 선을 넘어서 버린 것 같다. 남은 생에 그런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을 영순위로 둘 정도로 가치관을 달라지게 한 경험이다.
이곳은 오후 7시 반만 되면 사방이 캄캄해지는 산골이라 달리 할 일이 없다. 편의점을 가려고 해도 어두컴컴한 언덕을 넘어 사오십분은 걸어가야 한다. 군것질을 좋아하는데 자연스레 과자와 탄산을 끊다시피 하게 되었고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곳에 온 다른 작가 선생님들 모두 휴먼 디톡스를 바란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종일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을 때도 있다.
첫 보름간은 이 호사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았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 말고는 사람의 말이 들려오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사람과 부딪히는 일 없이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거나 홀로 침잠하는 시간. 밤에는 개구리 소리가 들려오고 아침에는 닭 우는 소리에 깨어난다. 그러나 보름을 넘어가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주말 동안 휴가 나가는 군인의 마음으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친구를 만나 기름지고 바삭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복귀하겠노라고 리스트를 적었다. 친구를 만나 실없는 수다를 떨고 오랜만에 통화가 된 친구와 사는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이 과정에서 쇼펜하우어의 그 유명한 ‘고슴도치의 딜레마’ 우화를 떠올리게 됐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립과 상대와의 일체라는 두가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딜레마다. 추위 속에 놓인 고슴도치들은 따듯해지기 위해 붙지만 너무 가까이 붙으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은 체온을 나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적당한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가 늘 어려운 문제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상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공자도 ‘중용’을 중요한 가치로 두었다. 어렸을 때는 극단적인 것이 매력적이었다. 명확한 어느 한쪽이 아니라 중간을 지향하는 건 어쩐지 비겁하거나 애매한 태도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조화를 이루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살아가며 배우고 있다.
편의점도 없는 이곳의 생활을 이야기하면 그게 무슨 사서 고행이냐고 도시의 카페에서 쓰면 되지 않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어주시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대접받는 기분이 들고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세상사 내 마음 같지 않은데 내 마음은 과연 어떤지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시골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혼자만의 시간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누구라도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홀로 고립되어서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