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홍인혜 | 시인
더는 미룰 수 없다. 치과에 가야 한다. 어른이 되어 제 신체를 관리하고 산 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치과 방문은 늘 미루게 된다. 미룰수록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코끝에 감도는 소독약 냄새나 치아에 파고드는 드릴의 진동, 두개골을 흔드는 그 쨍한 소음을 떠올리면 예약 전화를 걸 엄두가 안 난다. 치과에 가야 하는 이유는 사랑니 때문이다. 내 입 안에는 쓸데없이 성실하게 돋아난 상하좌우 네개의 사랑니가 있다. 제법 반듯하게 나서 큰 탈이 없는 한 데리고 살기로 했는데 야속하게도 문제가 생겼다. 칫솔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썩은 모양이다. 종종 시큰거리고 이따금 이 주변 잇몸이 부어 볼을 씹기 일쑤다.
아마 이번에 치과에 가면 네개의 사랑니를 모두 발치하라고 권할 것이다. 생니를 여러개나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치과행이 더욱 두렵다. 도대체 사랑니는 왜 돋아나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사랑니, 사랑니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다 문득 이 언어의 맛이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랑니는 모두 알다시피 영구치가 모두 난 지 수년이 흐르고 성인이 될 무렵 느닷없이 돋아난 번외의 치아다. 영어로는 위즈덤 투스(wisdom tooth)로 ‘지혜 이’쯤 되는 것 같다. 서구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비슷한 의미를 공유하고 있었다. 독일어로도 사랑니는 지혜와 이의 조합어이고,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로도 판단력이나 슬기를 뜻하는 단어와 치아의 조합어가 바로 사랑니다.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들이니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사랑니는 중국어로도 지치(智齿), 역시 지혜의 이를 말했다. 베트남어로도 같은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성인이 되고, 사리분별이 될 무렵 상징물처럼 세워진 비석 같아서 모든 나라에서 그런 명칭을 붙였으리라.
물론 모든 언어가 똑같지는 않았다. 사랑니는 인도네시아어로는 ‘막내 이’ 정도의 의미였고, 일본어로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이’라는 재미있는 뜻이 있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랑니는 꼴찌로 나온 이이고, 난데없이 등장한 존재니까. 그런 것에 반해 우리말 ‘사랑니’는 참 독특하고 흥미롭다. 사랑을 알 무렵 태어난 치아라는 의미가 직관적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사랑’이라니 신체 부위에 붙이기에 사뭇 낭만적인 칭호였다. 사랑뼈, 사랑살, 사랑관절 같은 단어를 떠올리면 단박에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나. 하지만 이 치아는 ‘사랑니’인 것이다. 생각할수록 절묘한 것이 사랑니는 정말 사랑과 닮아 있다. 사랑니가 날 무렵을 돌아보면 잇몸이 두근두근하고 시큰시큰한 낯선 감각에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잇몸은 피가 몰려 더 붉게 부풀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심장처럼. 그리고 어느 날 혀로 매만져보니 문득 여태 없었던 희고 단단한 것이 이마를 내밀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이 이미 내 것이 되어 뿌리내린 무언가가. 그리고 그것은 제멋대로 통제할 수 없이 커져가 미열과 통증을 선사했다. 오,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한 사랑의 메타포가 아닌가.
나는 이런 것에 매료된다. 국제정서를 따르자면(?) 이 치아는 ‘슬기이’ 정도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혹은 ‘나중니’나 ‘어른니’도 직관적인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사랑’을 데려오다니 최초의 명명자는 시인이 아니었을까? 그의 작명이 일반명사가 되었다는 지점도 근사하다. 그 머나먼 옛날 사람들이 그의 감성에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맞지, 사랑이 그렇게 쑤시고 시큰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뜻 아니겠는가. 시절이 이렇게 바뀌고 가마가 전기차가 되고, 봉화를 올리다 메타버스에서 만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정서가 한결같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물론 치통의 역사도 그만큼 유구하다는 점은 애석하다. 나는 치과에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