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현재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을 취임 직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세상읽기] 손아람|작가
지난 20일 윤석열 당선자는 기자회견을 열고 단상에 올랐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에 관한 발표였다. 평소처럼 간단히 대본을 읽어내려간 뒤 회견을 마칠 줄 알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당선자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다. 브리핑을 실무자에게 넘기지 않고 직접 이어간 것이다!
당선자는 한 손에 지시봉을 든 채 새 집무실 조감도의 구석구석을 짚어가며 계획을 설명했다. 조감도가 기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자 단상으로 들어올렸고, 즉석에서 걸리적거리는 발언대까지 치워버렸다. 준비된 세팅이 아니라서 보좌관들이 무선마이크를 뒤늦게 공수해야만 했다. 한시간 가까이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무속 논란부터 졸속 행정에 대한 비판까지, 내용은 여과없이 공격적이었다. 당선자는 대변인에게 역할을 떠넘기지 않고 모든 질문을 즉석에서 다 받아냈다. 단단히 마음먹은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의 타당성 여부는 내 주제를 벗어난다. 당선자는 이날 자신의 의제를 내세워 정면으로 부딪혔고, 그래서 내 눈에는 처음으로 지도자답게 보였다. 정책을 관철할 개인적 의지를 증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집무실 이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당선자가 생각의 표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을 것이다. 괜찮은 언론 대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괜찮았던 건 자신의 결정을 “청와대 용산 이전”이라는 일곱 글자로 페이스북에 통보하지 않아서였다. 반대로 의문이 생긴다. 왜 여성가족부 폐지 문제는 이런 식의 정면 돌파를 시도하지 않는 걸까? 몇달이 지난 지금까지 집무실 이전처럼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할 수는 없는 이유가 뭘까? 계획을 세울 계획이 있기는 한가?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보면 여성가족부 폐지 문제는 대통령 집무실 이전 못지않게 팽팽하게 찬반이 갈라진 쟁점이다. 집무실 이전과 달리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고 국회 동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행하려면 훨씬 더 성실한 설명과 납득이 필요하다. 이대로라면 정부조직법 개정은 국회에서 부결될 게 뻔하다. 하지만 대선 10대 공약으로까지 제시된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의 내용은 여전히 페이스북에 게시된 일곱 글자로 방치되어 있다. 이런 식의 도발적인 접근은 선거 승리에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을지 몰라도 공약을 실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가지 가설은 당선자 쪽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젊은 남성 유권자들은 단 한가지 이슈에도 지지율을 보태고 거두는 매우 특수한 동향을 보였다.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은 ‘한 세대는 한 인물을 따라가지 않는다’며 자신만만해했지만,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캠프에서 밀려나거나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캠프에 합류할 때마다 지지율은 자동반사처럼 요동쳤다. 이념 투표를 행사하는 전통적인 유권자보다는 불매운동을 펼치는 정치 소비자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가장 붙들어두기 어려우면서 동시에 가장 유혹하기 쉬운 유권자층을 다루는 데는, 여성가족부를 화석으로 남겨두는 편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국회에서 부결되거나 국회 임기 만료로 정부 발의안이 자동 폐기되면, 여당인 국민의힘은 비판을 면피하고 여성 유권자를 적당히 달래면서도 돌아오는 선거마다 효과가 증명된 일곱 글자의 약속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편의점 도시락이 유통기한이 임박할 때마다 진열대 맨 앞쪽으로 튀어올라오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가 선거용 구호였다면, 더 시간을 끌지 말고 철회하는 게 모든 유권자를 위한 예의다. 혹은 당선자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진지하게 염두에 두고 있다면, 집무실 이전 안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열린 자세로 다뤄줬으면 한다. 이미 완료되었다는 ‘여성가족부의 소임’이란 게 뭔지, ‘권리 구제에 더 효과적인 방향’이라는 게 정부 조직 바깥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혹은 새로운 정부 조직 편제가 어떤 형태인지, 지난 기자회견처럼 지시봉으로 통계표와 정부조직도를 구체적으로 짚어가며 설명하고 반론을 들어볼 수도 있지 않은가? 당선자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궁금해한다면 집무실 이전 사안 외에도 최대한의 소통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최대한이라는 게 여성가족부 폐지의 경우에는 일곱 글자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