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김진철 | 책지성팀장
1949년. 독일에서 기본법이 만들어지고 이스라엘은 유엔에 가입한 해.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창설되고 소련은 원폭 실험에 성공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북한에선 조선노동당이 창당했다. 남한에서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고 반민특위는 해체됐다. 목포형무소에서 수감자 350여명이 탈옥하고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되고 징병제가 시작됐다. 한글 타자기가 처음으로 시판된 것도 1949년이었다.
그해 9월20일, 동터오는 새벽이었을까. 선선한 아침나절이었을까, 햇살 따사로운 오후였을까. 막바지 산고를 버텨낸 끝에 터져 나온 아기 울음소리에 젊은 엄마는 그렁그렁 물기 고인 눈으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을지 모른다. 갓난아기 다룰 줄 몰라 쩔쩔매는 남자는 아이 아빠일 것이다. 아기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 이웃들이 몰려와 기뻐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아기는 누이나 형이 있었을까. 겨우 눈 뜬 아기를 바라보며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환대 속에 아기가 태어난 경북 울진군 북면은 아름다운 곳이다. 해발 998m 응봉산 기슭에서 흘러내린 물이 용소폭포와 덕구저수지를 거쳐 부구천은 동해로 이어진다. 아기는 소년으로 자라나 천변에서 멱 감고 뛰어놀고, 청년이 되어 너른 바다까지 호기롭게 나아가길 꿈꿨을 것이다. 고려 시대 말 사냥꾼들이 발견했다는 덕구온천은 1980년대에 이르러 개발되기 시작했으니, 30대에 이른 그 역시 온천 개발 바람을 타고 남다른 계획을 세운, 한 집안의 아버지였을 수도 있겠다.
조간신문을 살피다 ‘무연고 사망자 알림’을 보고 망상에 빠져들었다. ‘대구광역시 동구 공고 제2022-368호’ 아래 전아무개씨 생의 끝자락이 무미건조하게 요약돼 있었다. ‘2022.2.23. 08:00 대구광역시 서구 국채보상로 302’. 일흔세 해를 버텨온 전씨는 이날 이때 이곳에서 마지막 숨을 가쁘게 뱉어냈다. 드넓은 하늘 아래 홀로 남아, 연고 없는 이는 병원에서 숨졌다. 사인은 ‘급성 주정 및 약물 중독사’. 화장을 거쳐 경북 칠곡군 지천면 납골당에 안치됐다. 그날 대구의 최저 기온은 영하 6도, 최고 기온은 영상 4도였다. 구름이 많이 낀 날이었다.
태어나 살다 죽는 삶의 궤도에서 벗어날 이는 없다. 우리는 대체로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몸이 불편해질 것이고 홀로 남아 외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오래 살게 됐고 혼자 사는 이들이 늘어나고 빈곤 문제는 심화하고 있다. 전씨 같은 무연고 사망자는 해마다 늘어난다. 무연고 사망자의 절반은 65살 이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40살 미만 무연고 사망자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감염병 탓에 무연고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각자도생의 풍조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나도, 당신도, 누구나, 전씨일 수 있다.
2022년. 한국에는 새 대통령이 뽑혔고, 북한은 화성-17형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우리는 투표장에 나갔고 먹고 자고 깨어나 일했다. 중부 유럽에서는 전쟁이 발발했다. 우리는 한탄하고 분노하고 걱정한다. 사람들은 죽어 나간다. 감염병으로, 전쟁으로, 혐오와 차별로, 혐오와 차별에 기대는 갈라치기 정치로. 우리는 패를 가르고 나뉘어 서로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괴롭히고 멸시한다. 장애인의, 여성의, 성소수자의, 가난한 이들의, 늙고 젊은 이들의, 아픈 사람들의 비명을 가둔다. 나와 당신의 외마디도 갇힐 것이다.
홀로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지만, 일간지 한 귀퉁이에 짤막하게 적힌 한 인생의 끝을 알리는 공고는 한없이 쓸쓸하다. 지난해 공식 집계된 무연고 사망자는 3159명이다. 지난 10년간 연고 없이 숨진 이는 2만명이 넘는다. 쓸쓸한 가운데도, 봄은 밀려든다. 남쪽으로부터 벚꽃 소식이 들려온다. 전씨의 생이 다한 대구에도, 그가 태어난 울진의 망양정로에도, 뼛가루가 놓인 칠곡의 팔거천에도 벚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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