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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끄럽지도 감출 이유도

등록 2022-03-24 18:04수정 2022-03-26 17:07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의사들이 진료 봉사를 왔다. 전교생을 볼 시간은 없었는지 반에서 제일 아프거나 약한 아이 하나씩을 뽑았다. “우리 반에선 누가 좋을까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왜? 따져 물을 새도 없이 나는 뒷문을 열고 양호실로 가야 했다. 어둑한 복도를 홀로 걸어가 차가운 청진기를 가슴에 대던 그 순간이 생생히 떠오른다. “괜찮네. 심장이 좀 약한 것 빼곤.” 의사는 시큰둥하게 나를 돌려보냈다. 그래, 영화에 나오는 불치병 같은 건 없다는 거지? 그런데 교실로 돌아가서는 뒷문을 쉽게 열 수가 없었다. 반 아이들은 언제부터 나를 ‘아픈 아이’라고 도장 찍어둔 걸까? 그 낙인이 병만큼 무서웠다.

얼마 전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선 이 낡아빠진 기억을 끄집어냈다. 흥분하면 거대한 레서판다로 변신하는 주인공의 친구 중에 팔에 동그란 버튼을 붙인 애가 있었다. 나는 그게 어떤 표지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아이도 변신할 거라 여겼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에스엔에스(SNS)에서 똑같은 버튼을 팔뚝에 붙이고 자랑하는 소녀를 보고서야 알았다. 포르투갈어를 번역해보니 이랬다. “영화에 1형 당뇨병 아이가 둘이나 나와! 인슐린 펌프도 나온다고!” 소녀는 당뇨와 함께하는 생활을 아름답게 보여주기도 한다. 혈당 수치를 알려주는 컨트롤러와 주사액을 넣는 인슐린 펜을 예쁘게 장식하고 방수포를 덮어 물놀이에도 데려간다.

시시 벨의 자전 만화 <엘 데포>도 떠올랐다. 4살에 뇌수막염으로 청각을 거의 잃은 주인공은 ‘포닉 이어’라는 특수보청기 덕분에 일반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재미난 수업도 듣고 친구도 사귀어야지. 그런데 한 아이가 말한다. “야 너 귀에 꽂고 있는 거 뭐야? 너 귀머거리냐?” 주인공은 그 무심한 한마디에 움츠러든다. 엄마가 ‘너는 특별한 아이’라고 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평범한 아이’다.

나는 이런 장치를 한 아이들을 거의 보지 못하고 컸다. 주변에서 조금씩 들리는 이야기들로 이유를 짐작해본다. 한국에도 1형 당뇨병을 앓는 아이들이 있지만, 인슐린 펌프를 내보이는 게 부끄러워 배에 붙이고 옷으로 덮는 경우가 많단다. 유치원에 보청기를 낀 아이가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너무 관심을 보이고 함부로 만져보려고 한단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일반학교에 보내면 학부모들이 항의하고, 그 아이들이 모인 특수학교를 만들려고 하면 주민들이 달려든다.

심장 약한 내가 다니던 반에는 안경을 낀 애가 서너명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절반은 안경을 낀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니 ‘안경잡이’라는 별명은 사어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도시로 전학간 뒤 이미지 세탁을 하고 ‘안 아픈 아이’가 되었다. 그러다 큰 덧니가 나서 6개월 동안 ‘철길’이라 불리는 교정장치를 달고 다니며 놀림을 당했다. 하지만 요즘은 연예인을 꿈꾸지 않더라도 미용의 목적으로 교정기를 하고 다니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안경, 보청기, 교정기, 인슐린 펌프, 의수, 보행 보조기, 휠체어… 모두 우리의 약해진 몸을 보완해주는 친구들이다. 아니, 이미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경우도 많다. “늦잠 자다 약속에 늦어 전화하려는데 안면 인식이 안 되는 거야. 알고 보니 안경을 안 썼더라고!” 스마트폰만 손에서 떨어져도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아무런 보조물이 필요없는 몸을 ‘정상’으로 삼고 그 바깥을 부끄러워하고 배척한다? 나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도구를 항상 지녀야 하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영화에서든 실제에서든 훨씬 더 자주 나오기를 바란다. 특별히 보호받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일하고 놀고 대화하고 장난치는 존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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