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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대한민국 대통령’ 되기

등록 2022-03-24 18:03수정 2022-03-25 02:31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시행하여 선진 경제를 추격할 시스템으로 개혁했고, 그와 함께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성공하며 우리나라의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가 된 김대중 대통령은 아이엠에프(IMF) 체제를 3년 만에 벗어나 세계를 놀라게 하고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냉전 체제를 완화하는 데 공헌했다.

김병익 | 문학평론가

새 대통령을 뽑은 지 2주가 되는데도 3·9 대통령 선거가 여전히 내 의식 속에 잠겨 있는 것은 이 투표가 내 생애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생각이 든 탓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되며 처음 들은 대통령이란 명사는 그 호칭이 주는 무거움과 그 후의 어설픈 역사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 이름을 이어 쓸 수 있을 만큼 내 기억 속에 잘 박혀 있었다. 이번의 윤석열 대통령까지 20대, 그리고 그 직함을 가진 열세분. 더불어 그들을 통한 정권교체의 과정과 그 과정을 거쳐 자라난 민주화 장면들이 회상되었다.

국회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초대 이후, 쿠데타를 통한 무력 집권, 체육관 대통령, 민주주의 절차를 밟은 직접선거 등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세습을 제외한 갖가지 방법으로 집권했다. 단 두분만 빼고 모두 중도 퇴임, 아니면 퇴직 후 곤경을 치러야 했다. 초대 대통령의 4·26 하야와 망명, 유일한 내각책임제 시절 대통령의 5·16 후 중도 퇴임, 장기집권으로 근대화를 주도한 대통령의 피살, 신군부 세력의 찬탈이 권력을 이어갔다. 군 출신인 두 대통령의 퇴임 후 수사와 수감에 이어, 다음의 두 대통령은 민주화 성취를 이루듯 멋있게 퇴직했다. 그다음의, 해방 후 출생 첫 대통령은 퇴임 후 자결했고 그 뒤를 이은 두 대통령도 물러난 후 재판을 받거나 탄핵을 당하고 감옥생활을 했다. 끝내 무사했던 대통령은 김영삼, 김대중 단 두분이지만 그 아들들이 수뢰죄 등으로 재판받았다. 통치자로서 영예스러울 수 있었던 분이 별로 없었던 것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한 우리 정치구조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여기에 또 궁금증이 뜬 것은 역대의 우리 대통령이 이처럼 불행과 불명예를 안아왔음에도 나라는 어떻게 말단의 후진국에서 선진국 반열로 올라설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난 70년의 반 이상은 열전과 냉전, 쿠데타와 정변이 잇달으며 고통과 혼란이 점철된 시간이었다. 나라가 이처럼 고생스럽고 집권자가 잘못했다면 경제는 으레 곤핍하고 사회는 퇴보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하고 부유해졌다면 그 인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끝내 다다른 생각은 그 지도자들의 그 오점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크게 잘한 일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순진한 반문이었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의 공헌을 짚어보았다. 그 기여들이 의외로 커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집권욕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보위했고 미국 원조로 국력 회복의 기초를 세웠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의 폭력 통치로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억압했음에도 근대화 작업을 통해 농업에서 공업으로, 새마을운동과 무역 입국으로 우리의 후진 경제를 근대화하며 중산층 육성으로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신군부 출신 두 대통령은 집권의 하자와 광주항쟁의 억압으로 옥살이를 했지만 먼저 분은 뛰어난 경제 각료를 ‘경제대통령’으로 내세워 성장의 힘을 다졌고 해방 후 우리를 옥죄어온 야간통금을 폐지(‘독재자의 아이러니’!)했다. 다음 대통령은 신도시를 개발하며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켰고 중국·소련 등과 북방외교를 열었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을 탈권위화하여 권력을 군부정권에서 문민정치로 연착륙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정착한 이후의 우리 대통령들의 성과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자신 민주주의의 투사였지만 금융실명제를 시행하여 선진 경제를 추격할 시스템으로 개혁했고, 그와 함께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성공하며 우리나라의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가 된 김대중 대통령은 아이엠에프(IMF) 체제를 3년 만에 벗어나 세계를 놀라게 하고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냉전 체제를 완화하는 데 공헌했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 21세기에 집권한 우리 역대 대통령들도 자유민주 체제를 공고화하고 선진화에 기여하며 경제 규모와 무역 수지에서 세계 10위권으로 비약하는 데 수고했다. 우리나라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인정된 70년의 멋진 역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힘든 직함을 훌륭하게 수행한 이분들의 덕분으로 봐야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잘함과 잘못이 함께하게 마련이고 대통령의 잘잘못은 그 위치 때문에 더욱 무겁고 크게 가려져야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집권자가 시해, 하야, 축출로 교체되어야 했다는 것, 자결, 투옥으로 비운을 겪었다는 것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이 부끄러움은 정치적 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대통령 스스로 그 위상에 삼엄한 두려움을 가지며 그 권력을 겸손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엄숙한 권고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선거의 극소한 표차가 오히려 승·패자의 협력을 촉구하는 집단지성의 표현으로 생각되는 것도, 우리 집권의 역사가 정변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힘찬 민주 발전으로 보이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연필과 만년필로 글씨를 쓴 내 또래 노년층은 4·19의 자유, 6·3항쟁의 민족으로 체제적 자기 확인 과정 속에서 민주시민이 되었고, 볼펜으로 공부를 시작한 내 자식 또래는 자본과 노동의 뜨거운 대결로써 도전과 성취의 경제적 평등관계를 이루려는 뜨거운 사회적 구성원이 되었으며, 손주 나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컴퓨터를 만지작거린 첨단 문명의 디지털 세대로 성장했다. ‘필’에서 ‘펜’으로, 그리고 ‘컴’에 이르는 노년-중년-청년 세대들의 문화적 배경이 보수주의 진보주의 중도(혹은 정책선택)주의의 주류가 되고, 이 필-펜-컴의 변화가 송수화기-휴대전화기-스마트폰으로의 소통 방법 진화를 이루며 그 삶의 일상 변화가 세대적·젠더적 시대 증상으로 표현된 듯하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결국 21세기 가장 젊은 ‘스마트 세대’가 결정했다. 이 과정은 혁명과 정변으로 권력을 빼앗던 불온한 시대부터 노동-자본의 힘겨루기를 거쳐 현실 정책의 선택으로 통치자가 되는 민주화로의 안정된 역사를 보여준다. 신구 권력의 순조로운 이전 과정에 이어, 지역 편중과 증오 어린 대결 심리를 걷어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갈등을 줄이며 상호주의의 포용으로 더욱 성숙시켜야 하겠지만, 역대 최소의 격차에도 선선히 승복하여 당선자에게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축하 인사로 보낸 패배자의 정중한 모습은 트럼프의 미국도 부러워할 우리의 당당한 민주적 에티켓이 될 것이다. 짧고 험난한 역사에도 이처럼 뚜렷한 정치 발전을 이룬 것은 이번의 ‘대한민국 대통령’ 뽑기가 내 말년의 기대에 안겨준 안도와 기쁨이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존경스러운 지성 정명환, 서광선, 이어령, 홍성우 선생님의, 잇단, 서거에, 벼랑 끝에, 선, 외로움으로, 삼가, 깊은 애도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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