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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제왕적 당선자’의 또 다른 구중궁궐

등록 2022-03-23 14:19수정 2022-03-24 02:31

지금 인수위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집무실 이전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걱정을 솔직하게 전달하기는커녕, 당선자의 굳은 의지를 칭송하고 “반대는 곧 대선 불복”이라며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윤핵관’들로 넘쳐난다. 이렇게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선 청와대를 용산 아니라 강남 한복판으로 옮겨도 구중궁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제왕의 독선’은 그런 환경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결국에는 대통령의 마음을 잠식하고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22일 오후 통의동에서 바라본 청와대 모습. 멀리 불을 밝힌 청기와 건물이 청와대 본관이고, 맨 앞의 불 밝힌 건물은 윤석열 당선자의 집무실이 있는 금융감독원 연수원이다. 연합뉴스
22일 오후 통의동에서 바라본 청와대 모습. 멀리 불을 밝힌 청기와 건물이 청와대 본관이고, 맨 앞의 불 밝힌 건물은 윤석열 당선자의 집무실이 있는 금융감독원 연수원이다. 연합뉴스

박찬수 | 대기자

정권교체기의 정부 인수인계 작업은 힘들 수밖에 없지만, 이번처럼 스스로 문제를 키우는 인수위는 처음 보는 거 같다. 이명박 인수위 때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륀지’ 발언이 실소를 자아냈지만, 적어도 국정 운영에 대한 기대치까지 낮추지는 않았다. 그런데 ‘윤석열 인수위’는 어떤가. 지난 21일 리얼미터 조사에서 ‘윤 당선자가 국정 운영을 잘할 것’이란 기대감은 49.2%로, 한주 만에 3.5%포인트 떨어졌다. 출범도 하기 전에 지지율이 50%를 밑도는 건 전례 없는 일이다. 청와대 이전에 관한 윤 당선자의 고집이 국민 기대감을 낮춘 결정적 요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지난 대선 결과가 말해주듯이 정치적 분열과 갈등이 너무 심해서 이것이 윤 당선자 지지율에 그대로 투영된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윤 당선자 스스로 약속했듯이, 모든 국민을 포용하려 애쓰고 반대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닐까. 비리로 구속된 자기편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라고 요구하는 걸 ‘국민 통합’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다.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윤석열 당선자는 용산으로 급히 대통령실을 이전하려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제왕적 문화’에 젖어들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윤 당선자는 ‘구중궁궐’이란 단어에 얽매여, 해방 이후 청와대에 쌓인 전직 대통령들의 유산이 대통령실 기능을 어떻게 확장하고 보완해왔는지 전혀 보지 못하는 듯하다. ‘제왕적 대통령’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이 ‘제왕적 당선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2003년 문을 연 청와대 상황실이 대표적이다. 이 상황실은 청와대 비서동 부근의 지하벙커에 만들어졌다.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 공격에 대비해 마련한 것이다. 2000파운드 폭탄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었다. 오랫동안 버려졌던 벙커가 있었기에 첨단 상황실을 훨씬 적은 예산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실에선 군·경찰·소방본부 등 22개 기관의 주요 정보가 실시간 취합되지만 곧 문을 닫아야 한다. 용산 국방부 상황실을 새로 활용한다지만, 여기엔 군 관련 정보만 들어올 뿐이다. 기능을 업그레이드할 순 있겠지만, 그 기간 동안 국가위기 컨트롤타워로서 대통령실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사이에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50일 만에 집무실 책상과 캐비닛은 옮길 수 있을지 모르나, 대통령의 긴박한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수십년간 구축해온 경호·군사·지휘 시설을 그렇게 단기간에 옮기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믿음으로 사안을 판단하려 한다. 권력자의 오만은 여기서 싹튼다. 박근혜 대통령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세월호 7시간 공백’이 그런 경우다. 그날 박 대통령은 본관 집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그날뿐 아니라 외부 행사가 없는 1주일에 사나흘은 관저에서 혼자 업무를 봤다. 왜 그랬을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 본관엔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함께 있었다. 어린 시절 그걸 보면서 자란 박근혜 대통령은 관저가 곧 집무실이란 인식을 가졌던 게 아닐까.

많은 이들이 윤 당선자에게 우려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건, 평생 누군가를 수사하는 검사로만 살아온 경력 때문이다. 가식적이란 비난을 받긴 해도 ‘국민과 여론’을 앞세우는 정치인으로서 경험이 없다. 그런 게 오히려 솔직함으로 어필해서 대선 승리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정 운영은 검찰 수사와는 다르다. 일단 목표를 정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죄 혐의를 입증하려 애쓰는 수사와 달리, 정치는 국민 뜻에 따라 때로 물러서고 때론 멀리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 ‘광화문 집무실’이 어렵다는 걸 깨닫고 주저없이 ‘용산’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애초 수사에서 진전이 없자 별건 수사로 피의자를 옥죄는 검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청와대를 구중궁궐로 만든 건 바로 사람이다. 지금 인수위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집무실 이전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걱정을 솔직하게 전달하기는커녕, 당선자의 굳은 의지를 칭송하고 “반대는 곧 대선 불복”이라며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윤핵관’들로 넘쳐난다. 이렇게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선 청와대를 용산 아니라 강남 한복판으로 옮겨도 구중궁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제왕의 독선’은 그런 환경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결국에는 대통령의 마음을 잠식하고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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