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새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게 될 용산 국방부 청사 일대의 조감도를 가리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주현 | 이슈부문장
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계획을 발표하면서 내보인 ‘용산 시대’ 조감도를 보면서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새 대통령 집무실이 될 국방부 청사 남쪽으로 널따란 잔디밭 공원이 펼쳐져 있다. 실제로 50m 옆에 있는 합동참모본부 건물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삼각지 일대 고층 아파트들은 원경으로 한참 물러나 있다. 삼각지역 일대는 보이지도 않는다. 용산미군기지가 공원으로 바뀌면 새 대통령 집무실과 연계해 많은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얼짱 각도를 위한 생략과 과장이 거침없다. 이날 윤 당선자의 발표 장면을 지켜본 도시·건축 전문가들도 “사기에 가깝다”며 비판하는 반응이 많았다.
걱정스러웠다. 누군가 제공한 근사한 청사진에 윤 당선자가 그저 휘둘리는 것이 아닌지, 잠재적인 문제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의도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지 못한 채 거침없는 의지만 앞세운 것이 아닌지.
용산 이전을 최대한 ‘선해’하는 이들은
백악관 모델을 거론한다.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건축가인 유현준 교수는 지난 17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용산 이전과 관련해 “신의 한 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우리가 백악관을 보시면 앞에서 워싱턴 내셔널 몰 같은 기념관들이 딱 있고 거기에서 백악관이 약간 언덕에 올라가게 돼 있다. 그런 구조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3월 윤 당선자가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 6월말 정치선언을 하기까지 ‘공부’를 한다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던 시절에 만난 사람이다. 윤 당선자가 제시한 공원 그림도
링컨기념관-워싱턴기념관-의사당까지 잇는 내셔널 몰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 21일치 <조선일보 >는 “윤 당선인 측은 미 백악관 집무동인 웨스트윙을 새로운 집무실 모델로 고려해온 것으로 전해졌다”고 설명했다.
왜 서울이 워싱턴을 따라해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정말 백악관을 모방하기 위한 의도였더라도 이는 워싱턴과 미국의 수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맥락을 떼놓고 하는 말이다. 18세기 말 워싱턴디시 밑그림을 짠 건축가 피에르 샤를 랑팡은 의회와 백악관을 두 축으로 하여 의회-행정부 간 균형과 견제의 원칙을 담았다. 20세기 초 수립된 ‘맥밀런 플랜’은 내셔널 몰과 링컨기념관, 제퍼슨기념관을 배치해 미국이 지향하는 독립과 자유, 평등의 가치를 명확하게 풀어냈다. 링컨기념관이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로 꼽히는 것도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마틴 루서 킹의 연설로 인해 인권의 보편적 가치가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백악관 역시 1800년에 완공된 이래 수차례의 증축, 확장, 보강공사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됐다. 즉, 윤 당선자 쪽이 지향하는 워싱턴은 시대에 부응하는 전문가의 계획과 시민의 행동, 그리고 200여년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애초에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던 ‘광화문 시대’는 단지 대통령과 참모가 같은 건물에서 일하고 문밖으로 나가면 시민들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광화문은 국가 지도자가 휘두르는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려는 시민의 열망이 분출되고 자유로운 담론이 오가는 직접민주주의의 전당, ‘광장’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셀카를 찍는 수준의 소통이 아니라, 반대 의견을 청취하고 항의를 수용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소망한 것이었다.
윤 당선자가 ‘광화문 시대’를 주장한 최초의 의도도 비슷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윤 당선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4대강 사업보다도 훨씬 급조되고 미숙한 청사진을 흔들며 50여일 만에 집무실 이전을 마무리짓겠다고 말한다. 여론의 반대는 본인이 직접 나서 ‘설득’하겠다는 것으로 충분한 모양이다.
공간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물이 담기면 물잔이고 술이 담기면 술잔이다. 너무나 손쉽게 광장의 소통을 저버린 윤 당선자는 용산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윤 당선자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다. 큰일이다. 불통과 과속이라는 우리 시대의 치명적 한계가 새 대통령 집무실에 담길 것이며, 그 불통과 과속을 옹호하는 대통령의 인식은 더욱 강화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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